Ink In Her Veins

용리 2021.06.24 7
그 어느 때보다 격변하는 시대에 사는 한 젊은 예술가의 자화상

뉴욕에서 재즈 아티스트로 활동해온 피아니스트 용리의 첫 리더 작인 〈Touch〉는 나를 통해 바라본 세상, 그리고 세상을 통해 바라본 나 자신의 흔적들을 담아낸 앨범입니다. 이러한 경험들과 고민을 작·편곡에 고스란히 담았으며, 현대적인 재즈 연주의 형태로 풀어내었습니다. 세계적인 연주자인 색소포니스트 Walter Smith III, 기타리스트 Max Light 외에도 다수의 뉴욕 뮤지션들이 참여하여 완성도를 한층 높였습니다.

-Ink In Her Veins

어릴 적 무심결에 보게 된 심야영화 한 장면의 어떤 인물은 그의 차 뒷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만년필을 꺼낸다. 그리고는 혀를 내밀어 만년필을 위에 올리고 만년필 속 잉크는 혀에 퍼지고 스며든다. 어떤 영화인지 무슨 내용인지도 기억조차 나질 않지만, 왠지 그 장면은 아직 내 기억 속 한구석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아니면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다시 생각해본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현상을 목격하고 각자 나름의 규칙과 방법으로 이를 정리한다. 그리고 정리된 생각들은 우리의 혀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고 전달된 생각들은 정신으로 그리고 정신으로부터 몸으로 번진다. 마치 잉크가 퍼지듯이. 
생각과 사고는 어느 한순간에 우릴 지배하거나 복속시키지 않는다. 다만 서서히 퍼질 뿐이다. 생각보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우리의 삶, 내 안엔 어떤 잉크가 흐르고 있을까? 그리고 그녀 안엔 나의 잉크가 흘러 퍼지고 있을까?

-Absent, Dry

우리는 모든 일에 집착하듯이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질문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존재한다고 믿는 모든 본질은 대부분 허상이기에 수도 없는 스스로에 대한 물음의 끝엔 언제나 공허함과 지독한 건조함만이 남아있을 뿐이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안고 한없이 추락한다. 얼마쯤 떨어졌을까, 나는 고개를 들고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적어도 내가 보는 세상은 나로부터 시작되고 나로부터 끝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다짐한다. 나만의 세상을 음악에 담아보겠다고.

-Touch

그 어느 때보다 격변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 매일 홍수와 같이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 그 도도한 물결에 휩쓸린 우리는 처절히 몸부림친다. 한참 물을 먹다 토해낸 농축된 감정들은 또 다른 바다를 만든다. 온갖 감정들 속에 헤엄치다 그 바다의 끝을 짚으면 나는 여태껏 지나오며 만들어낸 또 다른 새로운 바다가 내 뒤에 펼쳐진 것을 보게 된다. 그렇게 다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간다.

-Norwegian Fisherman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하루하루,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들, 지하철 안에서 채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수많은 사람, 숨 막히고 복잡한 오늘날에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풍경이다. 도시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다 보면 어느 한 길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권태, 우울감, 분노 등을 차례로 마주하게 된다. 벗어나고 싶다. 가능한 한 멀리.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한가로운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이 누굴까”라는 몽상 끝에 만난 Norwegian Fisherman. 그는 현실적이지만 가장 비현실적이고 또 남루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존재이다. 그 사이의 거리는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매우 멀고도 가깝다. 이 곡은 멀고도 가까운 일상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로의 도약에 대해서 노래한다. 당신의 Norwegian Fisherman은 어디쯤 있을까?

세련된 멜로디의 드라마틱한 전개가 돋보이는 이 곡은 Tammy Scheffer의 몽환적인 목소리와 용리의 서정적인 피아노 연주, 그리고 Walter Smith III의 정제된 연주가 어우러져 감성적인 현대 재즈 음악의 정수를 담아낸다.

-Loop
Down the road Up the hill Into the house
Over the wall Under the bed After the fact
By the way Out of the woods Behind the times
In front of the door Between the lines Along the path

동명의 시 “Loop”(R. Creeley)에서 따온 제목으로 시는 삶의 연속성을 대비와 대조를 통해 미니멀하게 표현한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우연을 접하고 사는 것일까,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작은 것 하나하나도 모두 우연적인 일일 확률이 높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삶은 계속 반복되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다른 듯 같은 느낌. Loop는 삶의 우연성과 반복성 사이의 아이러니를 표현한 곡이다. 시의 가사에 새로운 선율을 입혔고 집단 즉흥 연주가 그 뒤를 잇는다. 이런 혼란을 거쳐 삶은 다시 궤도 안으로 돌아가고 또 다른 작은 우연들에 놀라고 반복들에 공감한다.

-Torn in Two

기술의 발달로 그 어느 때보다 서로가 가까운 시대에 사는 우리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분단의 세대다. 아침엔 확증편향으로 우려낸 차를 마시고 저녁엔 성급한 일반화의 이불을 덮고 잔다. 그리고 이는 서로에 대한 분노와 대립으로 이어지고 그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다. Torn in two는 분열된 사회에서 고립된 개인의 감정적 묘사를 두 개로 분리된 음악적 형식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한 곡이다. 

-Depressing Dietary Habits

“Now you know what might’ve caused your stomachache. You see, You hurried so all day long. Eat slowly, and chew thoroughly. Later on, drink lots of water. And then play. Hard play. Plenty of pep now. Yesterday’s stomachache is forgotton. See what good eating habits could do for you. That’s the way. Doesn’t it taste extra good that way? Now you’re eating pretty well. You just never took time before to find how good food can taste.” 

몇 년 전쯤 갑자기 찾아온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한동안 양배추와 감자샐러드를 주식으로 삼은 적이 있다. 나름 미식가라고 자부하는 나로서는 굉장히 힘든 경험이었다. 매우 우울한 식습관을 유지해야 했던 나는 이를 계기로 건강한 식습관에 대해 검색해보다 우연히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한 영상을 접하게 된다. 흑백텔레비전시절 무성으로 만들어진 영상에서 음식을 후다닥 먹어 치우는 한 어린이의 하루를 단막극으로 보여주고 어느 아저씨가 건강한 식습관에 관해 얘기한다. 이 영상을 멈추지 않고 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의아해하다가 문득 생각한다. “천천히 먹고, 꼭꼭 씹고, 물도 많이 마셔. 좋은 식습관이 너에게 얼마나 좋은지 보렴. 천천히 음식을 먹으면 얼마나 음식이 맛있는지 넌 여태껏 몰랐을 거야.” 라는 아저씨의 말이 비단 음식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도 그렇다는 것을. 격변하는 이 시대야말로 천천히 꼭꼭 받아들일 때 더 맛도 좋고, 잘 소화해 있다는 것을 역류성 식도염을 통해 배워봤다. 그리고 아저씨는 말했다. “Play, Hard play.”

-Silence Suffuses the Story

그해 봄엔 유독 많은 사람이 거리로 나왔고 함성이 울려 퍼졌다.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길거리에 몸을 내던졌고 그 위에는 피로 물든 꽃들이 피어났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이야기가 지나간 자리엔 침묵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침묵은 이야기를 대신하게 되었지만 모두는 알고 있다. 침묵은 이야기보다 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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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All Songs Composed & Arranged by 용리(Yong Lee)
Tenor Saxophone - Walter Smith III (Track 2, 4, 5, 6, 7, 8)
Tenor Saxophone - Jacob Shulman (Track 2, 4, 5, 6, 7, 8)
Guitar - Max Light (Track 1, 2, 8, 9)
Vocals - Tammy Scheffer (Track 5, 6, 7, 9)
Bass - Simon Willson (Track 2, 4, 5, 6, 7, 8, 9)
Drums - Kayvon Gordon (Track 1, 2, 3, 4, 5, 6, 7, 8)

Recorded by Aaron Nevezie at the Bunker Studio, Brooklyn NY on 5/16/2019
Mixed and mastered by Jeremy Loucas at Sear Sound

Distribution Pageturner 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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