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탐구생활 #15 - 언더그라운드, 케이팝의 새로운 진화
<슬픔의 케이팝 파티>라는 것이 있다. 대중의 귓가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사라져간 케이팝의 대목들을 소개하는 트위터 계정이 호응을 얻으면서 실제 클럽에서 파티로 이어졌다. DJ 크루가 합류하고 든든한 스폰서까지 얻어 이제는 꽤 큰 행사가 되었다. 이 행사를 계기로 클럽 문화에 관심을 갖거나 디제잉을 배우는 케이팝 팬들도 있다. 왜 ‘슬픔의’ 파티일까 궁금하다면 주최 측이 자주 인용하는 가사들을 보면 느낌이 올 것이다. “더이상 슬픈 노랜 듣지 않을 거예요”, “그게 흔하니, 사랑이 흔하니”, “우리 만남은 수학의 공식”, “함부로 날 대할까봐 센 척하게 돼”, “갔어 오지 않아” 같은 것들이다. 때론 “MAMA가 안 준 (여자)아이들 전소연 신인상을 랩 떼창으로 챙겨주는 곳” 같은 문구가 보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과잉으로 시작해 과잉으로 끝나는 케이팝의 미학에 관한 것이다. 때론 당혹감이나 오글거림에 몸서리치기도 하지만, 그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기 때문에 슬프다. 또한 그런 케이팝 아이돌들이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사라져버리기도 하기 때문에 슬프다. <슬픔의 케이팝 파티>는 저마다의 취향과 응원봉을 가지고 가더라도 그런 슬픔을 공유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공간이다.
더 이상 슬픈 노래 듣지 않을꺼에요 내 맘을 알겠죠? 😇🙆🏻💌♥️🐶💫👻💍🍀🔥 pic.twitter.com/WfQotj8gxT
— 슬픔의케이팝파티 (@seulpeumkpop) 2017년 12월 31일
최근 몇 년간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 케이팝을 듣는 일은 드물지 않게 되었다. 케이팝을 거의 전문적으로 트는 DJ도 있고, 케이팝을 주제로 한 파티도 종종 열린다. 사실 해외 케이팝 팬들 사이에선 길게는 10년 전에도 유행하던 일이다. 오히려 ‘케이팝 종주국’인 한국에서 최근에야 커지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겠다.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원한다면 공개방송이나 콘서트를 보러 갈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아이돌 당사자가 출연하지도 않는 곳에 모일 필요가 별로 없다는 것이 그 한 가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케이팝과 언더그라운드가 원래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 데 있다.
대체로 어떤 장르 음악은 언더그라운드에서 발아하게 마련이다. 주류와는 다른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모이는 공연이나 파티 등이 있다. 그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새로운 음악이 선보여진다. 그것이 인기를 모으면 스타가 탄생하기도 하고, 주류 음악계의 누군가가 신선한 요소를 찾아 이를 차용하면서 대중에게 소개한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장르 음악은 그렇게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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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은 정반대다. 고도성장기 이후 소비자층으로 부상한 십 대를 겨냥해 성인들이 기획하고 만들어낸 문화다. TV의 영향력이 매우 강한 환경에서 TV 음악방송이라는 환경에 맞춰 소비자의 선택을 받으며 진화해왔다. 또한 아이돌과 팬의 관계는 취향보다는 인연에 가까운 감정이다. 그러니 취향이나 라이프스타일에 의해 나뉘는 언더그라운드와는 문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다른 장르와 결정적 차이점은 바로 언더그라운드와 주류 사이의 관계라는 요소가 빠져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언더그라운드에서 케이팝 등의 ‘댄스 가요’를 폄하하는 시선은 꽤 오랫동안 지속돼 온 것이다.
IDOL (Official MV)
- 방탄소년단그러나 지금의 언더그라운드는 물리적인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터넷에 가상의 언더그라운드가 펼쳐진 것이다. 단적인 예로, 세계 시장에서 케이팝이 성장해온 방식도 그렇다. 세계 무대에서는 소수 문화인 케이팝을 중심으로, 특정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인터넷을 매개로 모여 언더그라운드를 형성하고, 그 규모가 커지면서 영미권을 비롯한 주류 시장까지 진출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방탄소년단의 ‘Idol’이 보여주는 복합적인 음악 스타일이나, 엉뚱하게 대량복제되고 조합된 영상이 휘황찬란한 색감으로 번쩍이는 뮤직비디오는, 인터넷 문화에 대한 오마주라고도 할 법하다.
빅스, 몬스타엑스, 뉴이스트, 에프엑스의 매시업
인터넷이라는 언더그라운드는 이미 케이팝 문화에 다양한 영향을 끼쳐왔다. 당장 커버 댄스 영상이나 리액션 비디오 등이 그렇다. 또한 조금 더 음악 창작에 가까운 콘텐츠도 잔뜩 찾아볼 수 있다. 곡의 핵심 요소(주로 보컬)를 가져와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리믹스(remix), 여러 곡이나 뮤직비디오를 절묘하게 뒤섞는 매시업(mash up), 음악을 아주 느리게 재생하면서 자르고 이어붙이고 왜곡시키는 찹 앤 스크류(chop & screw) 등은 케이팝을 대상으로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과거의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에 있을 수 없었던 것을 보여주는 베이퍼웨이브(vaporwave)가 유행하면서 케이팝을 옛날 느낌으로 뒤바꾸는 영상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레드벨벳과 잭슨파이브의 매시업, 또는 레드벨벳의 베이퍼웨이브 믹스
방탄소년단과 왬!의 매시업, 또는 방탄소년단의 베이퍼웨이브 믹스
케이팝 찹 앤 스크류를 주로 하는 애교킬러(Aegyokiller)의 케이팝 믹스세트
뿐만 아니라, 아이돌의 무대를 한 멤버만 따라 다니며 찍는 멤버 직캠을 방송국에서 직접 제작하기도 하고, 릴레이 댄스나 세로 라이브 등 직캠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콘텐츠들도 등장한다. 여러 무대를 촬영한 영상을 매끄럽게 이어붙이는 교차 편집(stage mix)을 음악방송 카메라워크가 모방하는 경우도 있다. 조금 멀리 보자면, 팬들이 ‘지하’에서 창작하고 향유하는 팬픽 문화가 케이팝의 콘텐츠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지도 이제는 꽤 오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