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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탐구생활 #17

가요 탐구생활

가요 탐구생활 #17 - 기획사의 첫 아이돌

한없이 경쟁이 치열한 아이돌 세계. 성공의 요인도 실패의 이유도 다양하다. 대개 공통적으로 꼽는 요소 중에는 바로 기획사의 규모가 있다. 대형 기획사일수록 성공한다는 것이다. 일리 있다. 자금력이나 투자유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성공한 선배 아이돌이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팬들도 기획사의 기획력이나 취향에 신뢰감(또는 충성심)을 쌓았고 미디어도 더 큰 관심을 갖는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얻은 노하우나 시스템의 구축, 실무적인 인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은 대형 기획사조차 신인의 입지를 다지는 데 꽤나 시간이 걸리는 기색이다. 이는 신인들이 살아남기 어려워진 환경과도 관계가 있다. 하지만 상황이 몇 년이나 지속되면서 다시 소형 기획사의 기획력이 주목받는 시대가 되고 있다. 환경이 어려울수록 오히려 더 뚫고 나오는 신인들은 그만큼 과거와는 조금 다른 접근법을 요구 받는다. 노하우나 신뢰도가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해 기존의 방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생 기획사, 또는 아이돌 그룹 제작은 처음인 기획사들에 한 번쯤 눈길을 돌려보고 싶어지는 이유다. 이들 중에 미래의 씨스타, 인피니트, 걸스데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굳세게 자라나 대중의 사랑을 받고, 또 그 힘으로 자신의 후배 세대를 키워낸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기 때문이다.

#1정통파 노선

노하우가 없다고 해서 보는 눈도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새로운 기획자라도 자신이 보아온 아이돌의 상이 있을 것이다. 이른바 ‘정통파’ 아이돌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검증된 매력, 시장에 언제 어떤 바람이 불더라도 최소한의 기본을 할 법한 그런 노선이다. 대중도 이들을 낯설게 느끼지 않는다. 다만 익숙한 스타일이다 보니 자칫 지루해 보일 수도 있어서, 뚝심과 실력, 그리고 빛나는 매력의 힘이 그만큼 중요한 노선이라고도 할 수 있다.

키위 미디어그룹의 첫 아이돌인 공원소녀가 그렇다. 청순하고 발랄한, 말하자면 ‘걸그룹의 왕도’에 가깝다. 프로듀서 김형석이 기획사 수장으로 있는 만큼, 화사한 아이돌팝이라도 꼼꼼하게 잘 짜여진 프로덕션이 돋보인다. 이름과 콘텐츠에서 묘하게 풍겨오는 ‘덕스러운’ 요소들도 흥미롭다. 사실 걸그룹의 ‘덕후’ 노선은 생각보다 안정적인 성공요인은 아닌데,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 함량을 유지하면서 풀어내는 감각에 주목해볼 만하다.

보이그룹 중에는 윈 엔터테인먼트의 스펙트럼을 눈여겨 보게 된다. 2018년 5월에 데뷔해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어서, 자연스레 타임라인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그룹이기도 하다. 저돌적인 기조와 달콤한 스타일을 번갈아 구사하는데, 1세대 H.O.T. 이후 정립된 ‘보이그룹 왕도’를 따르고 있다고 하겠다. 물론 과거를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 보이그룹 시장의 문법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브랜뉴뮤직의 AB6IX도 흥미로운데, 워낙 잘 알려진 힙합 레이블에서 아이돌의 정수에 한없이 접근하는 선택을 내렸기 때문이다. 워너원으로 폭발적 인기를 끈 박우진, 이대휘와, 역시 ⟨프로듀스 101⟩에서 활약한 임영민, 김동현의 유닛 MXM을 중심으로 꾸려졌다. 이미 MXM의 활동을 통해 레이블의 색깔과 아이돌 세계의 접목을 시도한 바 있어서인지 든든한 안정감이 느껴진다.

#2트렌디 노선

좀 더 최근의 흐름에 발 맞추는 기획사도 있다. 대중에게 편안하게 다가가되 지루하지는 않게. 어차피 시장 전체와 경쟁해야 한다면 ‘적당히 요즘 노래’를 들을 때도 한 번 더 노출될 수 있어 좋다. 이 경우 트렌디한 사운드나 스타일을 매끄럽게 소화할 감각이 중요해진다. 또한 데뷔곡이나 첫 아이돌은 그 그룹이나 기획사의 미래 향방을 결정짓는 역할을 하기도 하므로, 트렌드가 변했을 때 뚝심이나 유연한 대처도 중요해진다.

밴디트를 기획한 MNH 엔터테인먼트는 이미 청하를 배출했는데, 청하 역시 아이돌임에는 분명하지만 여러모로 특수성이 있고, ‘아이돌 그룹’을 구성하는 데에는 또 다른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볼 여지가 충분해 이 분류에 넣었다. 밴디트는 어느새 하나의 조류가 된 ‘걸 크러시’의 맥락 위에 있다. 걸 크러시는 의미도 범주도 불분명한 유행이라서 해석하는 데에도, 기획으로 구현하는 데에도 조심성이 필요하다. 밴디트는 외면의 힘차고 당당함만이 아니라 내면도 단단한 인물상을 잘 표현해냄으로써 이 난관을 돌파했다. 겉으로 화려한데 속내는 담백한 듯한 청하와 조금 다른 점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 기획사가 캐릭터의 입체성에 관심을 두고 있음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위인더존은 춘 엔터테인먼트의 정식 첫 보이그룹이다. 김용국이 JBJ에서 인상적인 활동을 하기도 했고, 프리데뷔 유닛 용국&시현의 미니앨범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작년부터 ‘윗츠(Witz)’라는 이름으로 데뷔 준비를 알리기도 했었다. 그만큼 이 데뷔의 뒤에는 오랜 고민과 실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데뷔곡 ‘내 목소리가 너에게 닿게’는 트렌디한 사운드에 감성적이면서도 상큼한 느낌을 담아냈다. 보이그룹의 ‘귀여움’ 노선이 ‘청순’으로 변모하고 또 다시 만화적인 생동감을 덧입고 있는 최근의 흐름이 아주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3이색 노선

기획력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역시 이색적인 선택이 절묘하게 빛날 때다. 일단 눈길을 끌기에도 좋아서 미디어에 소개되는 경우도 있다. 잘만 되면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도 한다. 기획사로서도 욕심이 날 만도 한데, 신선함을 어필할 수 있고 틈새를 노려 공격적인 활동을 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아직 입증한 것이 적은 신생 기업의 입장에서 투자를 유치하는 데에 장점이 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과격한 콘셉트로 입에 오르내리는 경우도 있다. 또한 틈새를 노린다는 도박성이 있는만큼 실패했을 때 멤버들에게 리스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과포화된 시장을 참신한 아이디어로 뚫고 나오는 경우는 분명 있으니 여전히 주목하게 되는 분야인 건 사실이다.

온리원오브는 다양한 분야의 연예인을 거느린 8D 크리에이티브의 첫 아이돌 그룹이다. 대표가 여성인 것으로 알려진 점 또한 업계에서 흔치 않다. 그래서인지 멤버들의 외모와 이름(보이그룹 멤버 이름이 러브, 리에, 유정 등이다)부터 ‘남자남자’한 그룹들과 조금 결이 다르다. 케이팝 보이그룹 기준으로도 말이다. 이외에도 해시태그 미션이 달성돼야 수록곡을 공개하겠다고 공약한다거나, 팝업 카페를 열고 멤버들이 직접 근무하는 이벤트를 여는 등 다양한 면에서 이색적인 전략을 펼치고 있다. 뮤직비디오의 미감도 매우 독특해 눈길을 끈다.

걸그룹 중에는 미드나잇의 행보가 무척 독특하다. 소속사인 H&I 엔터테인먼트는 ⟨프로듀스 101⟩에서 이름을 알린 황인선의 동생이 대표로 있는 곳이다. ‘걸그룹 홍수났네’라는 제목의 싱글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는데, 아이돌 걸그룹 시장에 관해 직설적인 발언을 하는 내용이다. 뻔한 콘셉트와 부족한 실력의 걸그룹을 비판하기도 하고, 치열한 경쟁이 주는 압박감이나 절망감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잘 된 케이스에 한해) 몇몇 여성 아이돌의 실명을 거론하기도 한다. 상당히 자극적인 콘셉트인데, 아이돌의 꿈과 의지 역시 긍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어쩌면 ‘아이돌에 관한 아이돌’, 즉 ‘메타 아이돌’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4인디 노선?

인디 노선?

엄밀히 말해 제목처럼 ‘기획사의 첫 아이돌’은 아니지만 인디 활동을 하는 아이돌도 있다. 기획을 직접 하는 아이돌이라면 어쨌든 자신이 자신의 첫 아이돌일 수밖에 없겠다. ⟨아이돌마스터.KR⟩, ⟨리얼걸 프로젝트⟩ 등으로 알려진 허영주, 허정주는 어쿠스틱 사운드 중심의 포크 싱어 송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는데, 틱톡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배경음악으로 자신들의 곡을 제공하기도 하는 등 이색적인 전략을 보여준다. 한국 최초로 커밍아웃한 성소수자 아이돌이라는 홀랜드 역시 소속사 없이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용기 있는 메시지와 참신한 콘텐츠로 특히 해외에서 많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기획사는 어찌 되었든 누군가의 취향과 이상을 반영해 아이돌을 만든다. 어떤 의미에서는 창작이다. 그리고 아직 대중의 반응을 얻기 전에 세상에 내놓는 첫 아이돌이란 기획자의 속내가 가장 많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돌 당사자들 역시 기획사의 방향을 미리 알기 어렵고, 때론 큰 기획사가 제공하는 안정적인 서포트를 충분히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물론 반대로 ‘초심’을 간직한 기획사의 진정성 넘치는 지원이 따르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어떤 경우에든 기획사의 첫 아이돌이란 기획사에게, 그리고 아이돌 자신에게도 각별할 수밖에 없다. ‘제로’에서부터 새로운 싹이 움트는 걸 지켜보게 되는 대중에게도 마찬가지다.

올해 상반기에만 50팀 이상의 신인 아이돌이 데뷔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가 이전에 아이돌을 기획한 적 없는 신생 기획사 출신이다. 아이돌이라는 꿈의 세계에는 오늘도 겹겹이 새로운 꿈들이 첫 발을 들이고 있다. 이들 중 미래의 영광이 누구에게 돌아갈지 기대하면서, 모든 신인 아이돌에게 작은 화이팅을 외쳐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