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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세가 들려주는 한국대표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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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세

앨범유형
정규앨범 , 전체 / 가요
발매일
2019.08.07
앨범소개
본 앨범은 권리사의 요청으로 스트리밍 서비스만 이용 가능합니다. 이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이문세가 들려주는 한국대표수필
우리 민족의 지도자, 소설가, 시인, 수필가, 국문학자, 종교인 등 한국을 대표하는 수필 작품을 집대성!

[저자소개] 
김유정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하였다. 휘문고보(徽文高普)를 거쳐 연희전문(延禧專門) 문과를 중퇴, 한때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금광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가 《중외일보(中外日報)》에 각각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구인회 동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이 후 각별한 교우로 지내게 된 이상을 만나게 되었다. 폐결핵에 시달리면서 29세를 일기로 요절하기까지 불과 2년 동안의 작가생활을 통해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길 만큼 그의 문학적 정열은 남달리 왕성했다.
한국의 소설가.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가 《중외일보》에 각각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봄봄》, 《금 따는 콩밭》, 《동백꽃》, 《따라지》등의 소설을 내놓았고 29세로 요절할 때까지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발표했다.

민태원
호는 우보(牛步), 필명은 민태원(閔台原), 부춘산인(富春山人), 우보행인(牛步行人). 1894년 충남 서산 태생.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정경과를 졸업했다.
『동아일보』 사회부장, 『조선일보』 편집국장, 『중외일보』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5년 사망하였다. 신문학운동 초기에 「부평초」, 「애사(哀史)」, 「무쇠탈」, 「서유기」, 「오색 꼬리별」 등의 소설을 번역?번안하기도 하였다. 1920년 『폐허』 동인으로 참가하여, 창간호에 자연주의적 경향의 단편 「어느 소녀」를, 제2호에 예술가 지망생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 「음악회」를 발표하였다. 여러 편의 수필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그 중 「청춘예찬」은 힘차고 도도한 흐름을 느끼게 해주는 명수필로 평가되고 있다.

노천명
1912.9.2 ~ 1957.12.10. 황해도 장연(長淵)에서 태어났다.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화여전을 다닐 때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 졸업 후에는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자를 지냈고, 1941년부터 1944년까지 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친일 작품들을 남겼다. 8·15광복 뒤에는 《서울신문》 《부녀신문》에 근무하였다. 6·25전쟁 때는 미처 피난하지 못하여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되기도 하였다. 《눈 오는 밤》, 《사슴처럼》등의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했다. 널리 애송된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하여 ‘사슴의 시인’으로 애칭되었다.

이하윤
1906 ~ 1974. 시인. 호는 연포(連圃). 강원도 이천(伊川) 출생. 일본 호세이[法政] 대학 영문과 졸업. 《해외문학》 동인으로 1930년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ㆍ《문예월간》 등을 발간하면서 해외문학 소개와 서정시를 발표, 해방 후는 동국대ㆍ서울대 교수로 있으면서, 국제 펜 클럽 대회에 수차 참석했다. 저서로 시집 《물레방아》, 《실향(失香)의 화원(花園)》등과 역사집이 있다.

피천득(皮千得)
(1910.5.29~ 2007.05.25) 서울에서 태어나 중국 상하이(上海) 공보국 중학을 거쳐 1937년 호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중앙산업학원 교사로 근무했고, 8·15광복 직후인 194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교수를 거쳐 1946~1974년까지 서울대학교사범대학 교수로 제직했다. 1946년 서울대학교에서 영시(英詩) 강의 시작, 1954년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하버드대학교에서 1년간 영문학을 연구하였으며, 1966년 서울대 대학원 학생과장을 역임했다.1930년 《신동아》에 「서정소곡(抒情小曲)」을 처음으로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1932년 《동광》에 시 「소곡(小曲)」(1932), 수필 「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1933) 등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 대체로 투명한 서정으로 일관, 사상과 관념을 배제한 순수한 동심에 의해 시정(詩情)이 넘치는 생활을 노래하였다.

박두진
1916 ~ 1998 시인. 경기도 안성(安城)출생. 호는 혜산(兮山). 1939년 〈문장(文章)〉에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 《낙엽송》, 이듬해 《의(蟻)》 · 《들국화》가 각각 추천되었다. 그 후 《도봉(道峰)》 · 《별》 · 《푸른 하늘 아래》 · 《설악부(雪岳賦)》 · 《장미의 노래》 등 수작을 발표하였다. 이 시인을 시단에 내보내면서 정지용(鄭芝溶)은 ?박군의 시적 체취는 무슨 삼림(森林)에서 풍기는 식물성의 것이다?라고 말하고 ?시단에 하나의 신자연(新自然)을 소개하여 선자는 법열 이상입니다? 라고 극찬했다. 작품을 통해 나타난 초기의 경향은 자연을 형이상적 차원(次元)으로 일원화시켜 관조적이기보다 감각적으로 파악한다.

정지용
1902.5.15 ~ 1950.9 본관은 연일(延日).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신. 아명(兒名)은 태몽에서 유래된 지용(池龍)이고 세례명은 프란시스코(方濟角)이다. 가끔 ‘지용’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을 뿐이며, 여타의 아호(雅號)나 필명은 없다.
1920년대~1940년대에 활동했던 시인으로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 생생하고 선명한 대상 묘사에 특유의 빛을 발하는 시인 정지용. 한국현대시의 신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이상을 비롯하여 조지훈, 박목월 등과 같은 청록파 시인들을 등장시키기도한 시인이었다. 

차주환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1920년 12월 7일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다. 춘천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중국어문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어문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춘천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7년 이 학교의 항일 학생 비밀결사인 상록회(常綠會)에 가입해 졸업 뒤까지 계속 활동하였다. 졸업한 이듬해 가을, 상록회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1939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중문학자. 1937년 항일 학생 비밀결사인 상록회 가입 활동을 하고 광복 후 서울대학교 중문학과 교수, 한국중국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공자》, 《도교사상연구》 등이 있다.

박연구
수필가. 전남 담양군(潭陽郡) 출생. 1954년 광주고교 졸업. 1963년 《신세계)》에 《수집취미(蒐集趣味)》를 발표하면서 수필 활동을 시작하였다. 주요 작품에 《부수인생(負數人生)》 · 〈변소고(便所考)》 · 《스페어인생》 · 《귀항지(歸淃地)》 《바보네 가게》 등이 있으며, 그의 수필집에 《바보네 가게》(73)가 있다. 생활 주변에서 소재(素材)를 택하되, 부드러운 필치와 정교(精巧)한 구성(構成)으로 써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1970년 현대수필 동인회 주간(主幹), 1972년(수필문학)사 주간(主幹), 1973년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김동인
호는 금동(琴童), 필명은 춘사(春士) 혹은 김시어딤. 1900년 10월 2일 평남 평양 출생. 일본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와 가와바다미술학교(川端畵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김동인은 여러 가지 양식과 방법을 작품 속에서 실험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소설을 순수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공헌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상
저자 이상 李箱은 본명 김해경(金海卿). 1910년 9월 2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917년 신명학교에 입학해 구본웅(화가, 1906~1953)을 만나 친분을 맺고, 이후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화가로서의 꿈을 품기 시작한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현재 서울대학교) 재학 중 학생 회람지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하면서 시를 발표했고, 1928년 졸업 앨범에서 평생 동안 필명이 되는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조선총독부의 건축 기수가 되어 근무하던 중 건축학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디자인 현상 모집에 1등으로 당선된다.

박종화
1901 ~ 1981 시인 · 소설가 · 비평가. 서울 자암동(紫巖洞) 출생. 호는 월탄(月灘), 이밖에도 죵화 · 춘풍(春風) · 조수루주인(棗樹樓主人) · 조수루주인(釣受褸主人)의 필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소년시절 사숙(私塾)에서 12년간 한학을 수업한 뒤 1920년 휘문의숙(徽文義塾)을 졸업하였다. 같은해 문학동인지 〈문우(文友)〉를 발간하면서 문학수업을 시작하였고, 1921년 《장미촌(薔薇村)》 창간호에 처녀작 〈오뇌(墺惱)의 청춘〉과 〈우유(牛乳)빛 거리〉의 두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에 발을 내디뎠다. 다음해 《백조(白潮)》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창간호에 〈밀실(密室)로 돌아가다〉와 〈만가(挽歌)〉의 두 편의 시와 〈영원(永遠)의 승방몽(僧房夢)〉이라는 수필을 발표하였고, 이어 〈오호 아문단(嗚呼我文壇)〉이라는 평론과 〈목매이는 여자〉라는 처녀 단편, 시 〈흑방비곡(黑房悲曲)〉과 〈사(死)의 예찬(禮讚)〉을 발표함으로써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이효석
1907년 2월,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가산(可山), 필명으로 아세아(亞細亞), 효석(曉晳) 등을 썼다. 1930년에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경성농업학교 영어 교사,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 대동공업전문학교(숭실정문학교 후신) 교수 등을 두루 지냈다. 1928년 『조선지광』에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며 동반자 작가(同伴者作家)로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 ?노령근해?(1931), 「프레류드」(1931), 「오리온과 임금」(1932), 「돈(豚)」(1933), 「메밀꽃 필 무렵」(1936), 「분녀」(1936), 「산」(1936), 「들」(1936), 「개살구」(1937), 「장미 병들다」(1938) 등의 단편과 장편소설 『화분』 (1939), 『창공』 (1939, 후일 『벽공무한』), 그리고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1938)와 희곡 까지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1942년 5월, 평양에서 결핵성 뇌막염으로 3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부친에 의해 강원도 진부면에 안장되었다가 여러 차례의 이장 끝에 1998년 경기도 파주 공원묘지에 묻혔다. 매년 강원도 봉평에서 그의 작품 세계를 기리는 ‘효석 문화제’가 개최되고 있다. 

이광수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작가, 시인, 문학평론가, 페미니즘 운동가, 언론인이었으며, 조선왕가의 방계혈족, 사상가, 기자, 번역가,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와 독립신문 등을 맡기도 했었다. 유교적 봉건 도덕, 윤리관을 비판하였고,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했다. 언론 활동으로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번역가로도 활동하여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유진오
저자 유진오는 190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4년 경성제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1929년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1932년 보성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1927년 「복수」 「스리」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김 강사와 T 교수」 『화상보』를 통해 지식인의 고뇌를 보여줌으로써 식민지 시기를 대표하는 작가로 1930년대 후반 평단으로부터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다. 대한민국의 헌법을 1948년에 기초하였고, 그 다음 해에 「헌법해의」를 발행하였다. 1951년에 한일회담 대표가 되었고, 1952년부터 1965년까지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는 신민당 총재, 또한 국회의원으로서 야당 정치가 활동을 하였다. 1987년에 별세하였다.

설의식
1900 ~ 1954. 평론가 · 언론인. 함경남도 단천 출신. 호는 소오(小悟).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학과 졸업. 1922년 《동아일보》사회부기자로 언론계에 들어가 주일특파원 ·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1929년 주일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하여 《동아일보》의 〈횡설수설〉 단평란을 집필했고, 1931년 잡지 《신동아(新東亞)》를 창간할 때에는 편집국 장대리로 있으면서 제작을 총괄하였다. 그가 편집국장으로 있던 1936년 8월 《동아일보》와 그 자매지 《신동아》 · 《신가정(新家庭)》의 일장기말소사건을 일으켜 신문사를 떠났다. 광복후 《동아일보》가 복간되자 다시 언론계로 돌아와 주필과 부사장을 지냈다. 1947년 순간 《새한민보》를 창간하였다. 저서로는 《해방이후》 · 《해방이전》 · 《화동시대(花洞時代)》 · 《금단(禁斷)의 자유》 · 《통일조국》 · 《치욕의 표정》 · 《역풍기(逆風期)의 진로》 · 《소오문장선(小悟文章選)》 등이 있다.

김구
본관 안동.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九).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 황해도 해주 출생.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