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 정보

Ego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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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Blanche

앨범유형
정규앨범 , 일렉트로니카 / 가요
발매일
2022.05.04
앨범소개
유럽의 메인스트림 테크노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그들

훗날 한국의 일렉트로닉 아티스트들이 세계 무대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 기록한다면 피에르 블랑쉐의 활약 또한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에르 블랑쉐는 국내 일렉트로닉 씬의 약한 고리 중 하나인 메인스트림 테크노, 그러니까 타임 워프나 어웨이크닝스 같은 유럽 최대 테크노 축제의 메인 타임에 나올 법한 장르에 정면으로 도전해 성과를 거뒀다. 스케일이 크면서도 저음역을 많이 사용하는 까다로운 장르임에도 뛰어난 믹스 실력과 프로듀싱 실력을 발휘해 해외 페스티벌에서 울려 퍼져도 이질감 없는 높은 퀄리티의 완성도를 뽑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데드마우스와 칼 콕스가 이들의 음악을 튼 사건에서 특히 알 수 있다. 프로듀서들 사이에서 특히 신뢰가 깊은 데드마우스가 'Ares'를 틀었고, 테크노의 대부 중 한 명인 칼 콕스가 그룹이 리믹스한 베로카의 'Behind The Mask'를 틀었다. 셀럽 디제이들의 서포트를 넘어 그룹이 자체적으로 거둔 성과들도 높다. 비트포트 테크노 차트에서 'Ares'가 23위에 올랐으며, 'Collision'과 ‘Last Space’도 비트포트 순위에 들었다. 'Combat'은 2020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노래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피에르 블랑쉐는 빠른 시간 내에 한국을 대표하는 테크노 루키로 성장했다. 이제 국내의 멜로딕 테크노 장르를 이야기할 때 이들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정규 앨범을 통해 한층 다양해진 음악 스펙트럼

〈Ego〉는 피에르 블랑쉐의 첫 번째 정규 앨범이다. 그리고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계에서 정규 앨범을 낸다는 건 싱글 활동이 디폴트인 그동안의 프로듀싱 방식에서 벗어나 여러 곡을 일관성 있게 한 작품으로 묶어내는 고난이도의 프로젝트에 도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춤을 위해 만들어지는 댄스 음악의 한계를 벗어나 더 다양한 음악적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일탈의 기회를 얻는 것이기도 하다.

피에르 블랑쉐는 코로나로 댄스 음악계가 일시멈춤한 상황에서 오히려 정규 앨범을 준비하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여유를 발견했다고 한다. 페스티벌과 클럽들이 멈추고 디제이들이 집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멋진 신곡들을 낸다고 해도 그걸 디깅해 틀려는 사람이 없지 않을까? 신곡을 내는 것이 활동의 핵심인 프로듀서형 디제이 피에르 블랑쉐는 그렇다면 뭘 해야 했을까. 훨씬 긴 작업 시간이 소요되는 정규 앨범을 만드는 것이 현명한 선택 아니었을까? 앨범이란 명분을 통해 리스닝 성향 강한 곡들을 발표해 플로어 밖에 있는 리스너들과 만날 기회도 만들고 싶지 않았을까? 〈Ego〉는 피에르 블랑쉐의 그러한 현실적 고민과 새로운 시도 가운데 탄생한 앨범이다.

이번 정규 앨범을 통해 가장 성공적으로 진화한 부분은 바로 장르적 다양성이다. 그동안 피에르 블랑쉐 하면 웅장한 신스들 아래로 포-투-더-플로어 킥 드럼을 내리꽂는 스케일 큰 멜로딕 테크노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번엔 사뭇 다른 트랙들이 들린다. 첫 곡 'Brainwave'는 비트 없이 텍스처 위주로 전개되는 앰비언트 트랙이다. 앨범을 시작하는 웜업 성격이라 여백에 포인트를 둔 것이겠지만 코로나 이후 특히 급부상한 앰비언트 대세를 반영해본 건 아닐까? 'Passing Phase'는 미니멀한 테크하우스 트랙이다. 페스티벌의 메인 타임에 흐르는 테크노가 아니라 이비자의 테라스에서 선곡될 법한 라이트한 테크노다. 'Prime Step'과 'Commencement'엔 브레이크비트가 사용됐다. 테크노의 인장과도 같은 4/4박자 정박 킥 드럼을 잠시 제쳐두고 베이스 뮤직 아티스트들이 즐겨 쓰는 브레이크비트를 전면에 세웠다. 댄스 음악 아티스트에게 비트가 달라진다는 건 정체성과 직결되는 변화다. 이번 앨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다.

뿐만 아니다. 'Infinite Circle', 'Build A Fire Inside', 'Lasting Night'은 기존의 연주곡 위주에서 탈피해 과감하게 보컬 콜라보를 시도한 곡들이다. 피에르 블랑쉐는 비트 못지않게 코드 진행과 아르페지오 등 멜로딕한 요소도 뛰어났기 때문에 언젠가 보컬 곡을 해도 잘하겠다는 생각은 해왔다. 아니나 다를까 첫 청취에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를 선보였고 대중성과 댄스 음악의 멋 양쪽을 잡아 그 어려운 둘 사이의 균형을 훌륭히 맞춰냈다. 특히 대중성이 높은 'Building A Fire Inside'는 싱글 컷으로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피아노 독주 곡이 있기도 하다. 9번 트랙 'Log'는 비트는 물론 신스의 비중도 한껏 낮춘 채 피아노 독주가 곡의 중심을 차지한다. 8번 트랙 'D'에서도 후반부 2분을 피아노 독주가 장악한다. 결국 테크노 앨범에서 7분가량이 논스톱으로 피아노로 채워지는 드문 결과가 만들어졌다. 마우스로 찍어 입력한 피아노가 아니라 세션을 섭외해 실제로 연주했다고 한다.

과감한 시도들도 있지만 기존 정체성과의 연결 또한 소홀히하지 않았다. 여기에 수록된 곡들은 믹스만 잘한다면 기존 피에르 블랑쉐 곡들과 하나의 디제이 셋 안에서 아우를 수 있을 곡들이다. 멤버들의 신중한 성격답게 단절을 통한 파격보다는 새로운 가지를 뻗어보거나 연착륙의 변화를 시도했다. 이런 스무스한 변화가 오히려 어려웠을 텐데 그룹은 상당히 잘해냈다. 묵직하고 하드한 엣지가 있는 테크노 비트, 공간감 넓고 드라마틱한 에픽 성향, 마이너 스케일의 미니멀한 멜로디에서 오는 일렉트로닉 특유의 서정성 등, 기존 것들을 공유한 상태로 낯선 것들에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멤버들에 의하면 이번 앨범은 다음 챕터를 준비하는 동시에 예전 음악을 정리해보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원래 잘하던 것과 미래의 가능성 사이를 적절히이었다는 점에서 목표한 바를 훌륭히 달성한 앨범이라 볼 수 있겠다.

COMMENCEMENT: [명사] 시작, 개시, 학위 수여식, 졸업식

피에르 블랑쉐는 5년 전부터 그들의 새로운 둥지가 될 작업 스튜디오를 손수 빌드업 해왔다. 일산 호수공원 근처에 있는 어느 상가 건물 지하로 가면 고사양의 스피커와 온갖 음향 설비들을 갖춘 작업실 겸 스튜디오가 나온다. 두 사람은 수많은 영상과 원서들을 보며 어렵게 쌓아 올린 음향 지식을 바탕으로 직접 흡음재를 공수하고 못을 박아가며 작곡, 믹스, 마스터까지 가능한 나름의 프로페셔널 아지트를 만들었다.

하드웨어를 돌아가게 할 소프트웨어도 준비해두었다. 두 사람은 컨덴스(Condense)라는 자체 레이블을 설립하고 그들의 음악뿐만 아니라 다양한 아티스트 및 음악계 구성원들과 네트워크를 쌓을 예정이다. 이 앨범 〈Ego〉가 바로 컨덴스 레이블의 1호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Commencement'가 마지막 트랙에 위치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Commencement'는 사전적으로 '졸업식'과 '시작'을 동시에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성과와 노하우를 정리해 〈Ego〉라는 정규 앨범으로 모아낸 두 사람이 이제 다음 챕터를 위해 첫 발을 뗀다는 뜻 아닐까?

다음 챕터는 어떤 것이 될까? 앞서 말한 새로운 요소들도 포함되겠지만 실제로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니 꼭 그것들에 한정되진 않는다고 한다. 칠한 사운드 연출의 고도화, 보컬 곡을 포괄하는 대중화, 바이셉이 제시한 방향에 대한 동경 등 여러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꼭 그것들에 한정되진 않는 무규정 상태인 듯 보였다. 일단 교복을 벗는 것으로 끝나는 '졸업식'이란 상징을 사용한 데엔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아직은 가능성인 그 다음 챕터를 조금씩 구체화 해나가는 과정이 피에르 블랑쉐의 다음 여정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음악 저널리스트 이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