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 정보

오늘의 난 미지근하게 축제 (Live)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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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열고 창문을 여는 것을 좋아한다.
창문 바깥에는 몇 개의 화분이 쪼로록 놓여 있고
연둣빛 새 잎이 돋아나고. 그런 것을 알아보며 기뻐하고 싶다.
햇빛이 방안 깊숙히 들어와 네모난 백색을 만드는 시간에
청소기를 들고 먼지를 없애는 걸 좋아한다.
물 한 잔을 손에 들고 네모난 백색 속에
잠시 앉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베란다에서 빨래를 걷어 와 갤 때에도
이 공간에 앉는 걸 좋아한다. 이 공간은 아침에만
잠시 나타나는 커다란 방석이다.
습하고 컴컴한 생각과 감정들이 보송보송하게 건조되는,
제습 기능이 탑재돼 있다고 여기며 좋아라 한다.
조식은 쟁반에 담아 스스로에게 제공한다.
알록달록한 색상이 되도록 노력한다.
초록과 하양과 빨강과 노랑이 옆옆이 놓인 접시 앞에서,
간밤 꿈속에서 건진 이미지 몇 개를 이어붙여
서사를 만들며 조식을 만끽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태양이 있는 한, 이 지구에서의 이런 아침은 얼마간
건재할 것임을 입증하고 서 있는 창 밖 나무들을
바라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열렬히 나뭇잎을 매단
한여름의 늠름한 나무들을 바라보자면 우렁찬 것들이
지닌 고요함을 좋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커피콩을 분쇄하고 뜨거운 물을 내릴 때 주방에
커피 냄새가 퍼지는 순간을 좋아한다.
유리컵에 담긴 얼음이 뜨거운 커피와 닿을 때
주저 앉으며 내는 달그락 소리를 좋아한다.
찬 커피의 첫 모금을 꿀꺽꿀꺽 마실 때에 목젖의
활기를 감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세수를 하고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서 우편함에 꽂힌
책 한 권을 빼어들고 공원 벤치에 앉아 펼쳐 읽으면
따뜻한 식빵처럼 갓 구운 냄새가 책에서
배어나오는 것만 같다. 글을 쓰는 게 직업이라서
책을 읽는 이 휴식의 시간은 일을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참 좋은 핑계가 축복처럼
여겨지는 잠깐의 시간이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은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 하고 벤치에 누운
나의 얼굴을 덮는 덮개가 된다. 얼굴을 가리면
공원의 온갖 소리들이 행렬을 이루어 귓속으로 들어온다.
아주 작고 연약한 곤충이 된 듯한 귀한 시간이다.
좋아하는 일로만 채워진 아침이 그렇게 지나간다.
해가 지고 어두워져서야 해야 할 일을 시작한다.
우선 몇 자루의 연필을 꺼내어 깎아둔다.
나무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그 순간에 나는 시를 쓰는
몸이 되어간다. 메모들을 펼쳐놓고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지 결정한다. 첫 문장이 개운해야 고생을
덜하기 때문이다. 이 개운한 하나의 문장을 위해
하루를 보낸 것이라 해도 좋다. 표면장력으로
버티는 찰랑거리는 물 한 컵을 손에 들고
하루종일 걷는 기분. 어떨 때는 쏟게 되고 어떨 때는
컵을 어디에 두었는지조차 잊게 되고 어떨 때는
부지불식 간에 다 마셔버려 빈 컵만 남게 되지만,
무사히 찰랑이는 한 컵 물을 잘 들고 하루를
보낸 날은 그나마 무언가를 쓸 수 있다. 잘 쓰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다 쓰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다 쓰는 동안에 다른 헤아림이 끼어들지 않고
오로지 쓰는 것을 즐기는 무사함이 더 중요하다.
마치고 나면 졸업을 한 것 같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살면서 겪어본 다른 해방감들과는 많이 다르다.
시시했고 볼썽사나웠고 너저분했고 도저히 눈뜨고
봐 줄 수 없었던 자기자신과 잠시나마 결별하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해야 할 일을 무사히 마치고 주위를 둘러본다.
책상 위에는 온갖 책들이 꺼내져 있고 공책과
메모지와 인쇄된 종이들이 널부러져 있다.
꽁지만 남은 인센트 스틱 몇 개가 나무접시 위에서
재와 함께 뒹굴고 있다. 일어나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펴고 버릴 것들을 버리고 챙길 것들을
챙겨서 책상을 원상복구한다. 따뜻한 물을 반 잔 정도
마시고 창문을 닫고 커튼을 닫고 불을 끄고
이불을 덮는다. 해야 할 일을 무사히 끝낸
밤이 그렇게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