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人間探究

오재영 트리오 2019.05.16 31
“오재영 트리오” [인간탐구 人間探究]

베이시스트 오재영을 처음 마주한 건 2010년 겨울이었다. 당시 그는 한 제작사가 진행한 콩쿨 형식의 오디션에 이명건 트리오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이 밴드는 수위를 차지해 앨범 발표의 기회를 얻었다. 그 즈음 한국 재즈는 진정한 도약기를 맞고 있었다. 새로 등장한 참신한 시각의 젊은 연주자들 덕에 모방의 단계를 벗어나 비로소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해 가던 참이었다. 나에게 오재영은, 진지하고 차분하며 늘 무언가를 꿈꾸는 듯한, 섬세한 시선의 음악인이었다. 또 하나 특기할 점은 그의 인상적인 작곡. 이명건 트리오의 데뷔작에 실린 ‘Outcry’와 두 번째 앨범에 실린 ‘성난 군중’, ‘Requiem’ 등이 바로 오재영의 곡이었다.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꾸준히 연주에 임했던 오재영이 이제 자신만의 트리오로 첫 번째 리더작 [人間探究(인간탐구)]를 발표한다. 모든 곡을 그가 썼고 함께 좋은 연주를 들려준 이들은 피아니스트 임채선과 드러머 조해솔. 갓 믹싱 작업을 마친 초벌 음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 앨범이 올 한 해 꾸준히 회자될 특별한 성과물임을 직감했다. 예전부터 주시해오던 오재영의 작곡 스타일이 어느새 완성기에 접어들었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곳곳에서 드러난 번뜩이는 구성미는 재즈 듣기의 재미를 배가시켰다. 또한, 곡마다 풍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내러티브가 내재돼 있어 듣는 이들이 자유로운 감정이입을 경험할 만한 앨범이다.

오재영의 작곡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종종 하나의 테마가 솔로를 위한 틀이나 이야깃감에 머물지 않고 곡 전체의 흐름에서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구성체’로 자리한다는 점이다. 앨범의 전반부를 이루는 ‘Forsythia’(개나리), ‘흔적’, ‘A Net of Greed’가 특히 그렇다. 명료한 이미지를 지닌 ‘Forsythia’와 ‘흔적’의 테마는 의도적으로 연출된 인트로에 이어 주위를 환기시키는, 혹은 집약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A Net of Greed’의 박진감 넘치는 테마는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며 듣는 이의 감성을 쥐락펴락한다. 이러한 경향은 이른바 모던 크리에이티브(Creative) 계열의 재즈에서 종종 관찰되는 현대적 접근이기도 하다.

신선한 구성미의 ‘A Net of Greed’를 자세히 한 번 들여다보자. 더블타임 필의 서두가 숨 가쁜 호흡을 유발하다가, 매우 수학적인 테마가 색다른 공간미를 창출하고, 베이스―피아노―드럼의 순서로 각각 자유로운 브레이크(다른 악기의 보완 없이 독주로 연주되는 솔로)를 선보이며 독립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실 브레이크의 연이은 배치는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 도막의 솔로들이 다른 지향을 드러내면서도 매우 유기적인 관계를 이뤄 아주 특별한 순간을 연출해낸다. 드럼의 브레이크가 끝나갈 무렵 베이스와 피아노가 합세해 마무리를 이끌어내는 장면은 넓은 스펙트럼의 또 다른 이미지를 형성하며 ‘각성’의 효과를 안긴다.

‘작곡가 오재영’은, 아직도 밥(Bop) 계열 모던 재즈에 집중한 채 ‘스윙’을 기준점 삼은 한국의 보수적인 재즈 팬들에게 작은 경종을 울린다. 오재영 트리오의 앨범을 마주할 땐 템포와 박자를 아예 주시하지 말고 한결 더 자유로운 태도와 시선을 유지하면 좋겠다. 앨범에 실린 일곱 곡 중 ‘고샤’를 뺀 여섯은 모두 4박자. 그런데 ‘불한당’을 제외한 다른 곡들은 실제로 우리의 몸보다 ‘마음’을 더 많이 흔들게 한다. 비트에서 벗어나 이미지와 다이내믹의 흐름을 쫓으면 비로소 공감할 수 있는 세상. 주요 곡들이 일상적인 노래 형식을 취하지 않기에 일말의 낯섦을 느낄 수도 있지만, 오재영 트리오의 음악적 성과는 되레 그 지점에 자리한다.

“人間探究(인간탐구)”는 도발적인 타이틀이다. 오재영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어지고 끊어지는 걸 겪으며 많은 걸 느꼈다”고 했다. 삶의 감정은 시간이 흐르면 정돈되기 마련. 앨범을 인상주의적으로 묘사해 보면, 어떤 감정은 오래도록 곱씹을 먹먹한 추억이 되고(‘고샤’), 또 어떤 감정은 교훈을 안겨주기도 한다(‘불한당’). 때론 존재론적 의문을 안기고(‘Where Am I’),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생채기로 남아 과거를 더듬게 하는(‘사이먼의 틀니’) 경우도 있다. 결국 이 앨범은 삶과 인간관계에 대해 음악으로 써내려간 오재영의 고백록처럼 들린다. 청자들도 각자 자신의 경우를 이 앨범에 투영해 ‘관계의 의미’를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오재영은 긴 시간을 두고 앨범에 담을 곡들을 조탁해왔다. 많은 곡을 썼고, 그에 못지않게 또 많은 곡을 버리며 오늘을 준비했다. 피아니스트 임채선과 드러머 조해솔과도 쉼 없이 연주하며 이들만의 독창적인 트리오 사운드를 구축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세 사람은 독자적인 시각을 유지한 채 손가는 대로 연주에 임했으며, 보완과 견제의 미학을 넘나들며 다채로운 내러티브를 써내려 갔다. 풍부한 예술적 소양과 흔들림 없는 진정성. [人間探究]는 나에게 ‘탐미주의’란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온갖 추문과 혼란이 우리 사회를 잠식한 지금, 스스로 아름다워지려는 한 젊은 예술가의 차분한 목소리가 우리를 설레게, 아니 부끄럽게 한다.

- 김현준(재즈비평가)

[Credits]

All composed by 오재영(Oh Jae-young)
All arranged by 오재영(Oh Jae-young), 임채선(Yim Chae-sun), 조해솔(Cho Hae-sol)

Double bass - 오재영(Oh Jae-young)
Piano - 임채선(Yim Chae-sun)
Drum - 조해솔(Cho Hae-sol)

[Track List]
01 Forsythia
02 흔적
03 A Net of Greed (서브 타이틀 곡)
04 고샤
05 Where Am I
06 불한당
07 사이몬의 틀니 (타이틀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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