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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닉픽션 : 유령의 집

Blank black bl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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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il got my eyes

빛이 주황색으로 길게 도로에 늘어서 있다.
밤이 멀리 검게 앉아 있다. 악마라고 부르거나
유령이라고 부르는 것을 밤이 기다린다.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두 개의 길에서
아주 천천히 걸어온다.

낮에 이 자리에서 GPS는 서울과 경기도에
들어섰다는 말을 반복한다.
서울에 진입하였습니다.
경기도에 진입하였습니다.
서울에 진입하였습니다.
경기도에 진입하였습니다.

두 개의 길이 만나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제목을 잊어버린 영화에서 낡은 기타를 치는
흐릿한 모습 위에 어떤 목소리가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인터넷을 떠돌다가 발견한
이야기인 것도 같고, 오래 전에 읽은 책에서
나온 이야기일 수도 있다. 생각해보니 그것들
모두에서 조금씩 등장하는 이야기인 것 같다.

두 개의 길이 만나는 곳에 기타를
들고 서있으면 악마가 나타나서
기타를 가져간다. 악마는 기타를 연주하고
기타를 돌려준다. 악마에게 기타를
건네주면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기타를 돌려받으면
악마처럼 연주를 하게 된다.

‘악마’는 그것에 붙일만한 이름이 딱히 없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악마는 밤을 떠도는 것들, 어떤 장소 사이에
있는 것들의 이름 없는 이름이다.
그런데 왜 하필 악마라고 불린 것일까?
그것의 표정이 사악하고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서다.
악마의 연주는 장난스럽고 느리다가
빨라지며 몸을 조금씩 움직이게 한다.
밤이 멀리서 보고 있는 가운데 주황색
불빛이 끝없이 길어지고 흔들린다.
두 개의 길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는 사막도 아니고 평야도 아니다.
아파트가 줄지어 있는 서울 외곽의 도로인데
우연히 두 개의 길이 길게 만나고
있을 뿐이다. 여기는 악마가 찾아올만한
조건을 충족한다.

멀리 있는 밤이 점점 집중해서 보고
있는 가운데 사람은 지나가지 않지만
가끔씩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차를 피해야 할 것 같은 기분 때문에
집중이 흐려진다. 차소리는 한편으로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밤이 점점 깊게
두 길의 한가운데로 들어오고
있는 것으로부터
차가운 공포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밤은 여전히 주황색 불빛과 아파트와
하천 너머 멀리에 있다. 도로 가운데서
눈을 감고 숫자를 세어 본다. 처음에
10까지 세었다가 어둠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뜬다. 39까지 세어 본다.
소리와 밤과 악마가 아직
우리를 덮치지는 않았다.

밤은 수명과 운이 다했다.
도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것에 대한 소식을 스치듯이 어떤 골목이나
틈새에서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것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기다리는
의식을 치르고 있다. 오래된 이야기를
재연하는 이런 멍청한 짓을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가. 미친 악마가 되는 것은
도로에 눈을 감고 서있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고 시대착오적이다.
어느 도로 위가 아니라 아무 곳도
아닌 곳에서 밤은 살아가고 있으며
그 자리는 사실 여기와 관계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도 불안으로부터
그것을 기다린다. 사실 이건 별 의미 없고
조금 아찔한 놀이 같은 것이다.
바람 쐬러 나온 것이다. 아니면
새벽에 집에 있다가 잠이 안와서 담배를
피우러 나온 것이다. 이 놀이를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려고 한다.
밤은 웅크린 맹수처럼
아주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

주황색 불빛 너머 어둠 속에서 오래된
전설과는 다르게 악마는 천천히 다가와서
핸드폰을 가져간다. 악마는 핸드폰을 들고
밤의 깊은 곳으로 접속한다. 주황색 불빛이
미동 없이 깜빡거린다. 밤이 연주하는
침묵이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검소한 태도가 매력인 그는 오늘도
보이는 것에 값어치를 매긴다.
택시 대신 버스를 이용해서 500원
이상 절약했다. 다리가 조금 아프지만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7000원 하는
덮밥을 먹고 후회를 했다. 3500원 하는
편의점 도시락을 먹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린다. 다소 엉뚱하고 바보스러운
그 의 행동은 점점 심각해진다. 얼마를
주고 무엇을 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제는 1분 1초라도 값어치를 못하면
참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진 그는 수시로
깨면 꿈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모으기
시작한다. 어떤 믿음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기록이 언젠가는 값어치를 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매 순간을
기록하여 값어치로 환산한다. 사진을 찍고
업로드를 하고 다른 이들의 관심과 클릭수를
보며 값을 정한다. 79000원짜리 신발을 신고
8900원의 택시비를 들여 전시회를 가고
그 전시를 보고 느낀 점을 적기도 하고
휴대전화에 녹음해서 기록한다. 물론
비디오와 사진으로도 꼼꼼하게 기록한다.
여전히 기대만 가득하고 어떤 값어치도
생기지 않은 기록물들이다. 자신을 속이기
시작한다. 꿈을 꾸지 않고 꿈을 기록한다.
아무 말이나 녹음기에 몇 시간이고
떠들어본다. 동물 울음소리를 흉내낸다.
다리 근력을 키우기 위해 69000원 짜리
러닝화를 신고 택시비 거리로 12000원
정도 하는 곳까지 달려간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신은 신발 브랜드를 확인하면서
우물에 빠졌던 그 날을 추억한다. 고장 난
손목시계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습관이
있던 어린 시절 새로 산 신발을 신고 기쁜
마음에 달려가다 우물에 빠졌다. 말이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한다. 그때 그는 익사했다.
그 우물 위에는 작은 가게가 생겼다가
구멍 가게가 되고 다시 옆집들과 함께
허물어지고 은행이 되었다가 지금은
대형마트가 되었다. “정확하지 않은 끝”을
기억하는 그에게는 새신발과 기쁨, 물과
숨막힘이 중요하다. 어떤 영향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첨벙거리는 물장구 소리와 함께 그는
나타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도로에서
대형트럭은 수백 개의 택배 상자를 싣고
물을 첨벙거리며 달린다. 그 바퀴 밑에
그가 있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행인의 발밑에도 그가 있다. 물이 다
말라버려도 사라지지 않는다. 신발과
기쁨, 물과 숨막힘이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다. 감정과 물질에
밀접한 연관이 있는 그는 검소한 태도가
매력적이다. 고무 밑창이 닳아 없어지면서
기쁨과 신발은 점차 사라진다. 구멍이
생길 때 즈음엔 물이 스며들기도 한다.
묘하게 연결되는 관계 속에서 무엇이
어떤 값을 갖게 되는가에 집중한다.
다리 근력을 키워야 하는 상황과 동시에
첨벙거리는 물웅덩이가 되어야 하 는
상태. 평상 위에 거꾸로 뒤집힌 9900원
다이소 밥상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해를 멈추고 기록을 멈춘다.

첫번째. 먼저 포장지를 뜯는 시간은 자정에
맞춰 주길 바라네. 이 행위가 어찌보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네. 자정에 접어드는
시점이 아니라면, 아마 자네가 즐겨 쓰고
있을 안경의 렌즈에 기묘한 사건들이
보일 수 있을 걸세. 어쨌든 이 부분을
꼭 명심해주길 바라네.

두번째. 겉포장지를 뜯었다면 이제 검은
색의 박스가 보일텐데, 이 박스와 함께
동봉한 노란색의 스프레이로 검은 색의
박스를 모두 칠 하게나. 이 과정을 매우
세밀하게 작업 해주길 바라네. 그리고
이 과정은 10여분안에 완료하게나. 자칫
조금이라도 늦다가는 이 공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자네의 머리와 귀가 자네의
머리와 귀가 아니게 되는 꼴을 자네의
머리와 귀가 알게 될 것이네.

세번째. 노란 색의 스프레이로 박스를
모두 칠했다면 이제 박스를 뜯어볼 수
있다네. 그리고 박스에 가지런히 붙여 놓은
테이프는 자네의 것이 아니라네. 고이
한켠에 붙여두게나. 이 테이프는 이 공간
속에 살고 있는 ‘소리를 염탐하는 자’의
것이라네. 이 테이프는 자네가 간직하고
있다가 훗날, 그 자를 만나게 된다면
돌려주게나. 그 자를 알아보는 방법은
쉬울 걸세. 왜냐하면 이름 그대로 소리를
염탐하고 다니니...

네번째. 테이프를 고이 한켠에 붙여두었다면,
이제서야 박스를 뜯어볼 수 있다네.
박스를 천천히 여는 법은 알고 있을 거라
믿고 싶네만. 자네의 급한 성미는 이미
잘 알고 있어서 걱정이 들기도 하다네.
자네가 지내고 있는 여러 칼이 모여
있는 방의 간수가 알고보니 3개월 전,
큰 의식을 치를 때 슬쩍 이야기를 해 주더군.
자네의 급한 성미 때문에 저주를 받은
자들이 귀가 잘려나가고 있다고.
어쨌든 박스는 천천히 열어주길 바라네.

다섯번째. 박스 안에는 총 세 개의
박스가 있을 걸세. 먼저 등나무로 만들어진
박스는 자네의 앞에. 그리고 새의 깃털로
만들어진 박스는 자네의 왼편에.
마지막으로 인간의 손톱으로 만들어진
박스는 등나무 로 만들어진 박스와 새의
깃털로 만들어진 박스의 사이에 두게나.
무엇을 먼저 두고, 무엇을 나중에 둘지에
대한 순서는 상관이 없다네. 그저 박스의
위치와 간격이 중요한 것이니.
여섯번째. 그렇다면 이제 이것을 하나하나
열어봐야 하는데 자네도 눈치를 챘겠지만,
모두 열쇠가 필요하다네. 그렇지만 내가
자네에게 보내준 물품에는 열쇠가 없다네.
열쇠는 자네가 찾아야 하는데 모든
열쇠는 자네가 있는 그 곳. 여러 칼이
모여 있는 방에 있다네. 수고스럽겠지만
자네가 직접 찾아주길 바라네. 아래
내가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적어둘테니
걱정말게나.

일곱번째. 먼저 등나무로 만들어진
박스에 맞는 열쇠는 간단하다네. 방의
문을 바라봤을 때 왼편, 어둠의 지식이
흘러나오는 구멍에 바로 있을터이니.
그리고 그 구멍의 겉면을 자세히 보면
문자들이 수두룩하 게 적혀져 있을 건데,
그것을 이따금 한번씩 읊어보게나.
자네의 무료함을 달래줄 걸세.

여덟번째. 새의 깃털로 만들어진 박스에
맞는 열쇠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자네의
죽음의 소리가 필요하다네. 죽음의 소리
저편으로 들어가야만 비로소 열쇠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데...
가능하겠는가??허나 새의 깃털로 만들어진
박스를 굳이 열 필요는 없다네. 이 말은
자네의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한 말이기도
하나, 굳이 또 필요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네.
죽음의 판단에 맡겨보게나.

아홉번째. 자네의 죽음의 소리는
유용하게 사용이 되었는가?
그럼 이제 인간의 손톱으로 만들어진
박스에 맞는 열쇠를 찾아야 하겠으나,
그것을 찾기 전 자네는 의문이 들 걸세.
내가 지금 이런 여덟 아홉 가지의 행동들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박스 안의 것들이
얼마만큼 본인에게 중요한 것인지-같은.?
그것에 대한 답은 매우 간단하며 찾기
쉽다네. 먼저 자네가 자정 무렵에 뜯었을
포장지를 자네가 즐겨 쓰는 안경을 쓰고
봐주게나. 그리고 왼쪽이나 오른쪽 눈 중
한쪽 눈을 감고 귀를 막아보게나. 바로 알
수 있을 걸세. 알아냈는가?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록 하지.

먼지를 믿으라

검은 불꽃은 소리를 잡아 먹어서 검은
불꽃이 일렁이는 곳에는 소리가 없었다.
소리가 없는 곳으로부터 온갖 휘황한
먼지가 쏟아져 나왔다. 푸르고 붉고
노르스름한 엉겨 있는 먼지 더미에 우르르
우르르 짓눌려 두 눈이 뽑혀 나올 것 같은
순간 잠에서 깼다. 지난 30년간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지만 어제는 어두웠고 오늘은
눈이 부시게 밝다. 빛이야 어떻든 지난
30년간 매일 눈을 뜨고나면 열번의 깊은
숨을 후우우 후우우 몰아쉬며 천장의
구석구석을 살피다 일어난다. 그것은
눈을 감은 곳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거나
짓눌리지 않기 위해 두 팔로 버티며
근육을 단련하는 일이기도 했다. 덕분에
두 팔은 오래된 고목나무처럼 두꺼워지고
일그러지고 무거워졌다. 두 다리가
앙상하게 얇아져 가고 있는 것에
비추어보자면, 몸은 확실히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변해가고 있었다.
무언가의 요구에 따라 몸은 변해간다.
지난 30년간 한 번도 벗지 않았던
셔츠의 첫 번째 단추가 떨어져 있는 것을
안 것은 문을 나서기 직전이었다.
새끼손가락 손톱만큼 작은 크기에
검회색의 영롱한 빛이 파리리하게 감도는
플라스틱 단추는 원래는 네모난 모양이었지만
닳고 닳아 맨질맨질한 찌그러진
동그라미가 되었다. 신발을 신지
못하고 뒤로 돌아섰다. 한 발 한 발
되짚어 돌아가며 바닥을 살폈다.
끼익끼익거리는 나무를 이어 붙인
마루의 틈사이로 떨어졌을거라 생각하며
코를 박고 킁킁킁 샅샅이 살폈다.
지난 30년간 무언가가 사라진 적은
처음이라 적잖이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첫 번째 단추 없이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아니 편히 잠을
들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것은 목소리를
지켜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다른 단추들 중에서도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인데, 평생의 미래를 거기에
비추어 보곤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단추는 그렇게 지속의 시간에 대한
약속이었다. 집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뒤집어엎었다. 이 집에는 존 소네 경
(Sir John Soane)의 집처럼 온갖
사물들이 들어 차 있었다. 발 디딜
틈을 빼고는 미로처럼 뒤엉켜 있는
집의 벽과 천장과 복도와
방을 그득그득 채우고 있는 사물들은
나름 신중히 선별된
것들이었다. 다만 이 사물들은 아주
삽시간에 그러 모인
것들이었기 때문에 언제든 무엇으로
바꿔 끼워질 수 있었다.
사물들은 모두 같은 시간에 태어났다.
그 말은 모든 사물들이
같은 공간에 놓였다는 뜻이다. 단추를
찾기 위해 사물들을
모두 뒤집어엎었을 때 뒷면에는 텅 빈
어둠이 있었다. 그리 놀라진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 고고하고
아름다운 로마 시대의 조각상들도
뒷면은 하나같이 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비어 있는 뒷면은
사물을 가볍게 만들고
어디로든 옮기고 갖다 붙일 수 있게
해준다. 단추가 거기로 흘러
들어갔을 거란 의심은 자꾸만 커졌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이 집안에는 무언가가 숨어 있을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의심은 상상을 키워간다. 상상은
실재가 된다. 의심이
현실을 만들어낸다. 머릿속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귓가에서
소곤소곤대자 숨소리가 허억거리며
가빠진다. 지체할 수 없었다. 뒤집고
옮기고 척 척 척 척 한곳에 쌓았다가
다시 와르르르 무너뜨리고 흩어
놓았다가 자리를 바꿔
보았다가 결국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모든 것을 하나하나
창밖으로 버렸다. 쾅쾅쾅 아랫집에서
층간소음을 경고하기
위해 천장을 두드린다. 쾅쾅쾅쾅쾅!
쾅쾅쾅쾅쾅쾅쾅! 탕! 탕!
텅 빈 집에는 가구도 없고 빛도 없고
단추도 없다. 셔츠를 벗고
바지를 벗고 양말을 벗고 속옷을 벗고
탈탈탈 털었다. 파앙,
파앙, 더 세게 더 세게. 오랫동안 묵은
냄새가 그렁거리며
흩날린다. 단추는 지나치게 작고
가벼워서 냄새와 함께 아주 잠깐 공기
위에 머무를 거라 생각했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단추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눈앞에
그 영롱한 검회색 빛이 아른거렸다.
머리카락을 쥐어뜯다가 혹시 머리카락 속
에, 눈에 보이지 않는 깊숙한 곳에
박혀있을까 생각한다. 머리카락을 밀었다.
아주 짧고 가벼운 귓등과 두 볼의 털까지
모두 지워버렸다. 단추는 없고 온 몸이
아려온다. 아릿아릿 했다가 파르르
죄여오고 파스스 떨렸다. 눈을 뜬 채로
일곱 날을 보냈다. 여덟 날 째에
피부를 얇게 한꺼풀
벗겨냈고 아릿아릿했던 통증은
욱 욱 욱 하 며 커져온다. 이제
뒤집고 엎을 것은 없고 벗겨낼
것들만 남았다. 서른다섯
날 째에 두번 째 피부를 움켜잡으며,
고작 단추 하나가
사라졌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 이길래
이다지도 큰 고통을 견뎌야
하는지 물어본다. 도대체 이 상실을
얼마나 오랫동안 견뎌야
할지도 물어본다. 단추를 찾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이 고통이
사라질까? 다섯 달이 넘는 동안
열권의 노트에 번호를 매겨
문장을 쓰며 질문에 대답했으나
결국 감정의 불순물들만
남았다. 천 개의 문장에는 각각
하나씩 각주가 달렸지만 사실
그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고,
몸은 벗겨낸 만큼 작아지고
가벼워졌다. 삼백 오십 두 날 째에
왼쪽 어깨뼈와 날개뼈
뒷쪽을 매만지며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몸으로
쓰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오히려
눈이 없는 편이 더 나았다.
이야기를 써 나갈수록 검은 불꽃은
소리를 태우며 지글지글대는
먼지를 뿜어냈다. 불꽃이 커질수록
자글자글 바글바글한
먼지가 소음이 되었다.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때 쯤에는
더 이상 남아 있는 몸이 없었다.
몸의 흔적인 이야기만이
남아 자글자글 바글바글 불타며
휘황한 도시를 뒤덮었다.
거기에는 검회색의
영롱한 색이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