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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아 [청파소나타]

스페셜

부드러운 강함의 매력, '정밀아'의 정규 3집 [청파소나타]

INTRO정밀아 정규3집 <청파소나타> Ways of seeing, Ways of listening, ways of singing

그러므로, 나는 오늘의 나를 살 것이라.


매일의 오늘을 살아내는 세상을 담은 단편영화 같은 음악


부드러운 강함의 매력으로 사랑 받고 있는 정밀아가 3년만에 발표한 정규3집 <청파소나타>는 시간적으로 새벽부터 잠들기 전, 계절상 가을부터 초여름까지, 장소적으로 청파로-서울역 일대가 배경이다. 이 동네에 자리한 동쪽 끝 밝은 방이 있는 집으로 이사하면서, 매일의 오늘을 살아내는 나와 세상의 모습을 담았다.

INTERVIEW정밀아

Q. 신보 발매 축하드립니다. 아티스트 소개 부탁드려요.


정밀아(이하 밀): 안녕하세요. 저는 음악가 정밀아입니다. 포크 장르로 분류되는 음악을 하고 있어요. 곡을 쓰고 연주와 노래를 합니다. <금반지레코드>라는 이름으로 직접 앨범을 기획-제작하는 독립음악가이고요.

Q. 정규3집<청파소나타> 소개해주세요.


밀: 2집<은하수>이후 꼬박 3년 만에 발매하는 정규3집입니다. 10곡이 수록되어 있고요. 전곡을 직접 쓰고 편곡, 연주를 하였습니다. 내용적으로는 청파로 일대로 이사 가게 되면서 일어나는 나의 이야기와 세상의 풍경들을 담았습니다. 2집부터 <언제나 그댈> <무명> 작업까지 함께 해온 ‘스튜디오 로그’에서 작업했어요. 오랜만에 직접 피아노 연주도 했고, 기타연주도 조금 변화를 주었어요. 직접 채집한 앰비언트 사운드의 사용, 오랜 시간 함께 한 재즈연주자들과의 작업, 평소 좋아하던 음악가들과의 콜라보도 담겨 있습니다. 1, 2집과 동일하게 피지컬앨범(CD) 속에는 24페이지의 부클릿, 그 안에 저의 드로잉을 10컷 배치하였고요.

# 동네 탐구가, 소리 채집가, 그리고 음악가


Q. 앨범 제목에 특정 장소(지역)명이 들어간 만큼,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음악이라는 결과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도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서울로17717에서 바라본 서울역광장

청파로 일대에서 마주하게 되는 계단

밀: 우선 ‘청파[靑坡-푸른언덕]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지역은, 서울역 서부역을 나오면 전면에 펼쳐 보이는 동네를 지칭합니다. 용산구 서계동과 청파동 일대가 도로명 주소상 청파로입니다. 뒤편으로는 만리재, 아현동이 있고, 옆으로는 중림동, 남산, 후암동 등을 접하고 있어요.


제가 그 일대로 지난 가을 이사를 가게 되었어요. 노래 가사에서 언급했듯 동쪽으로 창문이 나 있는 집이고요. 이 동네를 그저 교통 편리한 곳 정도로만 생각하다가 하루 이틀 산책을 이어갈수록 신기한 구석이 자꾸 보이는 거예요. 재개발지역에서 도시재생구역으로 바뀐 최근의 역사, 구획을 정해 형성된 게 아니라, 그 옛날 자연스레 아래에서부터 한 채 한 채 쌓아 올려진 듯한 구조가 재미있었어요. 미로 같은 골목을 돌다 갑자기 나타나는 가파른 계단들(한국전쟁 때 시체를 쌓아 두었다는)을 마주하면 대체 이 동네에 뭐가 더 숨겨져 있을까 싶어서 너무 신났어요. 그래서 자료도 찾아보고 사진도 찍고 동네 계단에 가서 한참 앉아 있어도 보면서 뭔가 소스들이 축적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Q. 작업기간이 코로나19가 한창 심각해지던 시기와 맞물리는데요, 어떻게 보내셨나요? 영향이 적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작업을 이어가셨나요?


밀: 모두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요. 저도 다른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단독공연과 적지 않은 숫자의 섭외 등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지금을 좋은 무엇인가로 작용하도록 해야겠다는 오기도 좀 있었고, 지금 받는 영향들을 어떻게 하면 창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까도 고민했지요. 지금 와서 이렇게 말하니 좀 그럴듯하지만 사실 아휴, 쉽지 않았어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디 다닐 수도 없게 되니 하루 중 유일한 외부활동이란 것이 사람 없는 시간을 피해서 동네 인근을 걷는 것이 전부였어요. 좀 멀리 걷는다 싶은 날에는 시청-광화문까지, 서울로17717 초입부터 소월길을 따라 이태원으로 돌아 내려오는 루트, 만리재-아현동을 통과해서 홍대까지는 자주 걸었고요. 4번트랙 <오래된 동네>는 서계동-만리동-아현동 일대를 걷다가 탄생한 곡이고, 5번트랙 <광장>은 서울역광장-시청광장-광화문 일대를 걷다가 쓰게 된 곡입니다.

Q. 앰비언트 사운드의 사용이 돋보이는 앨범인 만큼, 소리들을 채집하게 된 이유나 배경을 말씀해 주세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을 듯해요.

아현동 풍경

동쪽으로 난 창문-이 창문 앞에 앉아 수많은 소리들을 수집했다

밀: 앨범에 쓰인 앰비언트 사운드와 저와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라 하겠습니다. 이사를 온 직후에는 몰랐는데 이 동네가 소음이 상당한 곳이더군요. 서울역 근처이니 당연할 수도 있겠고, 이 일대가 예전 봉제공장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라 원단 같은 걸 나르는 오토바이들이 하루에 (농을 좀 섞어서) 천대가 지나가거든요. 소리에 예민한 편이라서 많이 괴로웠어요. 데모를 녹음하려고 하면 온갖 소리들이 함께 담겨버려서 애를 먹었죠. 새벽녘에는 기차소리도 잘 들려서 자꾸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느라 그것도 고역이었어요. 그래서 안 되겠다, 이렇게 괴로울 바에야 이 소리들에 명분이나 역할을 줘버리면 어떨까, 그럼 마냥 괴롭지만은 않겠다 싶었죠. 미워하느니 아주 좋아해버리자 뭐 그런 마음이요.


곡을 한창 만들던 때라 일부러 다른 음악을 잘 안 듣던 기간이었는데, 자연스레 주변 소리들을 더 듣게 되었고 음악 또한 소리의 한 형태라 생각하기에 이 둘을 섞어 배치하는 게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서시> 도입부의 새벽녘 새소리들, <광장> 전체에 깔리는 집회소리, 동네의 소리들은 서울역광장-광화문 등지에서 제가 직접 채집한 소리들입니다. 그곳에서 받은 느낌들을 오롯이 전달할 방법을 찾다가 그곳의 소리를 담는 것, 이만한 게 없겠다 싶었어요.

# 나와 우리의 이야기, 그리하여 노래가 되는 것.


Q. 앨범 소개글에서 <균형감>이라는 단어와 <물음표와 느낌표, 쉼표와 마침표를 세상과 노래의 곳곳에 놓으며 틈과 경계를 걷는다>라는 문장을 보았습니다. 개인과 세상을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창작의 균형감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해주시겠나요?

앨범 속 부클릿 이미지 中

밀: 이 동네로 이사 오면서 음악 이외에 10여 년간 해오던 미술관련 일을 그만두고 이른바 ‘전업음악가’가 되었거든요. 그러면서 나는 이제 세상과 소통하는 채널 중 가장 크고 선명한 것이 ‘음악언어’가 되었는데, 앞으로 이 언어로 무엇을 어떻게 보고 표현할 것인가를 더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어요. 그 연장선으로 나는 어떤 곳에서 무엇을 보고 들으며 어떤 것에 둘러싸여 어떤 관계들 사이에 존재하는가 하는 것들을 살펴야 했어요. 노래들은 이 질문들 사이에서 태어났고요. <서시>는 3년 전 써둔 곡이기는 하지만, 이 다짐들을 대표해 줄 수 있겠다 싶어서 1번트랙에 싣게 되었습니다.


이번 앨범은 내가 지금 속해있는 환경들과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노래할 것인 것라는 물음표가 커지면서 시작되었다 하겠습니다. 그 곁으로 어떻게 들을 것인가까지 이어진 것이고요. 순수미술을 전공했던 이유로 이런 질문에 대해 훈련이 좀 되어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전 작품에서 그렇게 선명한 태도로 나타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1집 <그리움도 병>에서는 밀린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풀자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이러저러 했었어요’라는 게 주된 내용이었고, 거의 ‘나’를 향한 시선이었어요. 2집 <은하수>에서는 고개를 들어 세상을 좀 바라보기 시작했달까요. 그 점을 표현하려고 앨범 커버사진도 정면을 응시하는 컷으로 골랐고요. 이후 발표한 싱글 <무명無名>에서는 그 태도가 더 선명해진 것 같습니다.

이번 앨범 수록곡 <언니>는 마음의 아픔과 위로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제가 혼자 불렀어요. 우리는 알게 모르게 상호간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렇게 기대기도 하고 위로를 건네기도 하며 살아가는 것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요. <서울역에서 출발>은 리얼리티 거의 100%의 제 이야기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장소에 대한 추억 하나쯤 있을 공공의 장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광장>은 현대사회의 키워드 중 하나인 ‘광장’을 제가 본 바대로 기술하였고 그에 한 걸음 더 나간 ‘우리 마음을 내어놓을 한 평 마음의 광장은 있는가’하는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환란일기>는 세상의 모습을 관찰하고 기술한 곡입니다. 저 또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고, 또 사회적 거리두기나 격리의 시간 덕분에 관찰일기 같은 형태의 가사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이야기, 그러니까 개인이 배제된 창작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 모두는 개인인 동시에 다수에 속하고 또 자신인 동시에 타인이니까요. 어쨌든 창작물이 태어난다면 그 주체는 ‘나’이고 나로 수렴된 세계가 다시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나를’ 파먹는 일은 자칫 ‘함몰’ 또는 ‘감정적 호소’ 등으로 이어지기 쉽거든요. 그러니 창작자의 시선은 내부와 외부를 가열차게 오가는 것이 좋겠다 생각합니다. 그 사이의 어떤 균형의 지점을 찾도록 애쓰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고요. ‘공감’이라는 것도 이 사이 어디쯤에서 생겨나는 것 아닐까 싶어요. 물론 쉽지 않고 어디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라서 계속 공부하고 연구하고 그래야겠지요. 이번 앨범은 그에 대한 훈련을 시도한 작품이고 결과라 하겠습니다. 뭐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괴로운 동시에 무척 즐거웠던 것은 확실하고요. 감사한 마음으로 이 일련의 일들을 이어가 볼 요량입니다. 아직 많이 허술해서 더 잘 좀 했으면 좋겠고요. 노래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참말 최고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