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e

클래식 공감

클래식 공감

누군가는 다른 길을 간다 – 프레드 허쉬의 <Silent, Listening>

클래식 공감누군가는 다른 길을 간다 – 프레드 허쉬의 <Silent, Listening>

‘재즈 피아니스트’라는 말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습니다. 장르의 구분이 필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특정 장르에 갇혀 버리는 느낌이 들어서입니다. 키스 자렛의 연주가 재즈라는 카테고리에 묶이게 된다면 우리는 그의 연주에 대해 많은 것을 놓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르 언급을 피하고 싶은 또 다른 이유는 그 어떤 수식어로도 설명하기 어렵거나, 묘사가 불가능한 연주자들의 음악이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피아니스트 프레드 허쉬 또한 한두 마디로는 정의하기 어려운 음악을 들려줍니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점에서 그는 두말할 나위 없이 피아니스트이지만, 다른 방향에서 음악을 바라보는 듯한 연주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비교 대상이 없는 연주자로 평가 받습니다.

앨범 <Silent, Listening>은 지난 2022년, 이탈리아의 거장인 엔리코 라바와 함께한 앨범 <The Song Is You> 이후 ECM에서 두번째로 발매되는 앨범입니다. 첫 ECM 솔로 앨범으로 기록될 <Silent, Listening>의 공개와 함께 프레드 허쉬는 ‘모든 앨범에는 완결된 이야기가 담겨야 한다’는 생각을 풀어 놓습니다. 숏폼이 넘치는, 호흡은 점차 짧아져 아주 짧은 순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이 지배하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허쉬의 말은 공허한 울림만을 남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런 음악을 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삽니다. 1955년생의 프레드 허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간다는 감각을 피아노 앞에서 진심으로 느끼고 싶습니다. 

#아주 긴 호흡으로, 한달음에 - <Silent, Listening>

아주 긴 호흡으로, 한달음에 - <Silent, Listening>

지난 2023년 5월. 프레드 허쉬는 스위스의 루가노에 머무르며 새 앨범 녹음에 집중했습니다. 이미 엔리코 라바와의 ECM 첫 녹음 때에도 이곳에 머무르며 작업을 했기에 낯설지는 않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나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건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번 앨범 <Silent, Listening>에서 프레드 허쉬는 흐름을 만들어 내는데 집중합니다. 때로는 불안하게 들릴지라도 그마저도 자연스러운 흐름안에 있다는 감각을 이 피아니스트는 만들어 나가려 합니다. 시작은 듀크 엘링턴의 <Star-Crossed Lovers>. 부드럽게 연주되는 선율 이후 만나게 되는 두번째 곡인 <NightTide Light>부터 피아니스트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깨질 듯이 여리면서도 예민한 음들이 파편이 되어 여기저기를 찌릅니다.


거의 모든 뮤지션들이 그러하듯 프레드 허쉬 또한 계획을 가지고 앨범 녹음에 임합니다. 그리고 그 계획은 때로 계획하지 않기라는 방식으로 실행되곤 합니다. 이를테면 세번째 곡인 <Akrasia>에서 허쉬는 그도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즉흥 연주를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또한 앨범의 타이틀인 <Silent, Listening>에서 이 피아니스트는 음향으로 공간을 만들어내는 듯한 연주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종잡을 수 없지만 일관된 흐름은 계속 이어집니다. 앞서 들려주었던 화음을 그대로 이어와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는 <Starlight>에서 프레드 허쉬는 오래간만에 안정적인 음악을 들려주더니 이어지는 <Aeon>에서는 앞을 알 수 없는, 그러나 생생하게 반짝이는 불안감을 담아 들려줍니다. 그 뒤에 만나는 <Little Song>에서 흐르는 멜로디와 함께 청자는 잠시나마 긴장을 덜어낼 수 있겠고요.

이 앨범에 수록된 곡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경계 설정의 모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덧 앨범에서 가장 긴 <The Wind>까지 흘러 들어왔을 때, 프레드 허쉬는 그저 모든 것을 통제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 말합니다. 이제 음악은 앞서 들려주었던 즉흥적 요소를 한꺼번에 소개하고 있는 트랙 <Volon>과 함께 서서히 이야기의 매듭을 지을 준비를 합니다. 무슨 일인지 앙코르처럼 들리는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의 <Softly, As in A Morning Sunrise>와 이성을 가지고 이전의 음표들을 모두 주워 담는 듯한 <Winter Of My Discontent>왔다면 이제 더 갈 곳은 없습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프레드 허쉬의 <Silent, Listening>은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음반입니다. 음표가 많고, 연주 또한 짧지 않지만 앨범 그 자체는 그다지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 음반을 듣는 리스너는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로 좋아하는 멜로디를 듣고, 익숙한 감정을 만나기 위해 음악을 듣습니다. 그러나 허쉬의 음악은 조금 다릅니다. 이 피아니스트는 살면서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 우리에게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겠다는 자세로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그렇게 연주되는 끝없는 가능성에 여러분은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요? 이것이 이 앨범을 통과하는 분들에게 제가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