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정보

Whitney Houston

Whitney Hou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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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유형
여성/솔로
스타일
전체
데뷔
1985년 / My Heart Is Calling
아티스트 소개

I Will Always Love You, Whitney...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될 우리 시대 최고의 디바


화려하게 시작한 휘트니의 음악인생 1부는, '이보다 더 성공적'일 수 없었다. 어떤 가수도 기록하지 못했던 7곡의 연속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및 약 4,200 만장의 전 세계 앨범 판매고. 하지만 1, 2집의 히트 이후 세인들 사이에서 오르내리던 그녀에 대한 엇갈린 평가는 3년간 거둬들인 성과들에 있어 옥의 티였다.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로 백인취향의 노래만을 부른다.' 라는 찬사와 비난. 물론 그녀의 앨범에는 소울의 느낌을 담은 곡들이 있었지만, 휘트니와 더불어 1980년대 후반을 풍미한 여 가수 아니타 베이커(Anita Baker) 의 음악보다 덜 검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모든 전략은 그녀의 경력을 지속시키기 위한 측근들의 전술이었기에, 이제 휘트니는 자신만의 음악적 역량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3집인 [I'm Your Baby Tonight] 서 당시의 히트 제조기 엘 에이 리드(L.A Reid)와 베이비페이스(Babyface)의 합작을 선택했고, 좀 더 흑인 음악다운 색채를 앨범에 담아내기에 이른다. 이런 그녀의 노력은 앨범과 동명 타이틀인 첫 싱글의 차트 1위 및 발매와 동시에 [빌보드] R&B 앨범 차트의 정상에 오르는 성과를 낳으며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흑인 계층의 지지를 받는 데는 적중했다. 그러나 랩 음악이 본격적인 조명을 받던 시기여서 앨범 판매고는 전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진했고, 고심 끝에 택한 그녀의 시도마저 평가절하 되는 비운을 맛보게 된다. 그런 와중, 1991년 슈퍼볼 결승전에서의 애국가 공연에서 보여준 휘트니의 열창은 많은 미국인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그녀의 음악인생 2부는, 전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1992년에 개봉한 영화 [보디가드(The Bodyguard)]로부터 출발한다. 3집의 월드 투어를 끝내고, 휘트니는 케빈 코스트너와 영화 [보디가드]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발표했다. 휘트니와 그녀의 측근들은 사운드트랙 앨범을 상업적인 최고의 것으로 기획하였고, 그 결과 이 앨범은 '휘트니 휴스턴' 이란 가수를 언급할 때마다 함께 떠오르는 대형 히트 곡들을 배출하며 실로 엄청난 파장을 음악 및 영화계에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런 성공은 비평가들에게 새로운 비판거리를 제공한 셈이었고, 그녀의 음악성을 성토하는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즉, 휘트니가 라이브 공연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진정한 본향으로의 회귀'가 레코딩 상에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앨범의 성공은 물론 개인적으로도 결혼과 출산을 통해 인생의 기쁨을 누리던 그녀지만, 혹사로 인해 성대에 문제가 발생하면서 휘트니는 음악 인생의 적신호를 맞이하였다. 아울러 영화계에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두 번째 영화 [사랑을 기다리며(Waiting To Exhale)]의 사운드트랙에는 불참을 선언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레코드사와 영화 제작사의 종용으로 1995년 8월 세 곡의 신곡을 녹음했으며, 차트 1위에 오른 첫 싱글 'Exhale (Shoop Shoop)'에서 느껴지듯 늘 지적 되던 고음역 대신 깊이가 느껴지는 새로운 가창형태를 선보였다는 점이 괄목할 만한 변화의 일면이라 하겠다.
하지만 각종 루머와 특히 남편과의 불화 설은, 휘트니를 언론의 따가운 시선에 시달리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일련의 소문들은 뒤로 한 채 세 번째 영화 [프리처스 와이프(The Preacher's Wife)]와 사운드트랙을 1996년에 공개하기에 이른다. 휘트니는 자신의 음악적 뿌리인 가스펠과 영화에 어울리는 레퍼토리들로 앨범을 꾸몄고, 그 결과 이 작품은 가스펠 음악 사상 가장 높은 판매고를 기록하였다. 여기에 1997년 미국 ABC에서 방영된 영화 [신데렐라 (Rodgers and Hammerstein's Cinderella)]로 성공을 맛보며, 그녀는 팔방미인다운 역량을 과시하기도 했다.


해는 어느덧 1998년으로 접어 들었고, 휘트니는 참신한 사운드를 들려준 [My Love Is Your Love] 앨범으로 그녀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현존하는 R&B 음악을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한 4집은 원래는 히트 곡 모음집으로 꾸며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신곡들이 마음에 든 클라이브 데이비스와 휘트니는 급히 방향을 선회하였고, 덕분에 신보의 준비기간이나 홍보 기간은 채 6주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앨범은 부진한 첫 주 판매고를 기록하게 되었으며, 기대를 모았던 머라이어 캐리와의 듀엣 'When You Believe'마저 미국 내에서 별반 큰 반응을 불러 모으지 못했다. 그러나 이 후 히트한 'Heartbreak Hotel'을 비롯한 총 네 곡의 싱글들은 변화된 그녀의 음악을 대중에게 제대로 인식시킴과 동시에 꾸준한 음반 판매를 가능케 해주었고, [VH1 디바스 라이브 1999]의 성공과 월드 투어의 매진사례가 이어졌다.
휘트니는 그러나 2000년에 들어서며 그 해 1월 하와이 공항에서 짐 수색 중 발각된 마리화나 사건과 그 해의 오스카상 공연에 불참키로 하면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게 된다. 정작 본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하와이 사건 직후 뉴욕에서 있었던 로이 존스의 권투 시합에서 'God Bless America'를 열창하였고, 오스카상 공연 불참 이후 4월에 열린 [아리스타] 레코드 창립 25주년 기념 공연, 그리고 5월의 히트 곡 모음집 발매와 같은 음악적인 소식만을 대중에게 알려줄 뿐이었지만 루머를 잠재우기에는 역 부족 이었다. 이후 하와이 사건은 2001년 2월 하와이 경찰당국이 이를 기각하며 막을 내렸는데, 판결에 따르면 휘트니의 마약테스트는 음성으로 밝혀졌으며 약물 치료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의사의 소견서도 접수되었고, 향후 3개월간 다른 문제가 없다면 그녀의 범죄기록에서 이를 삭제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뒤를 이었다.
2001년 6월 휘트니는 [BET] 음악상의 공로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으며, 8월에는 백만 달러의 계약금으로 [아리스타] 레코드와 다시 체결하기에 이른다. 언론들도 잠시 그녀에 대한 고삐를 푸는 듯 비춰졌다. 그러나 9월 초 열린 마이클 잭슨 데뷔 30주년 기념 공연에서 보여준 야윈 모습으로 인해, 언론의 휘트니 사냥은 그야말로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그저 911 테러 사건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1991년의 애국가 싱글을 재 발매하는 것과 발라드 모음집 [Love, Whitney]를 공개하는 것으로 말 많던 2001년을 마무리 지었을 뿐이다.
2002년 초, 휘트니는 5번째 앨범 [Just Whitney]를 작업한다는 소식을 밝히며 새해를 시작했고, 그 해 7월 첫 싱글 'Whatchulookinat'을 선보이며 컴백의 신호탄을 날렸다. 하지만 언론을 향한 비난 섞인 가사와 진부한 댄스 넘버라는 평가로 말미암아 이 곡은 언론과 대중의 맹 비난을 받게 되며 빌보드 싱글 차트 96위라는 초라한 기록을 남겼고, 이후 모든 것을 속 시원하게 얘기한다고 밝혔던 12월에 가진 미국 ABC 유명 앵커 다이앤 소여(Diane Sawyer)와의 인터뷰는 인터뷰에 임하는 휘트니의 태도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인터뷰로 시끄럽던 와중 드디어 2002년 12월 9일 [Just Whitney]는 발매 되었고, 첫 싱글 'Whatchulookinat'과 같은 곡들로 인해 앨범의 완성도에 문제가 있는 건 사실 이었지만, 전작에서 보여준 '트렌디 R&B/소울의 휘트니화'의 연속성을 보여준 두 번째 싱글 'One Of Those Days', 미시 엘리어트와 함께 한 'Things You Say'는 단연 돋을새김의 곡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차트 성적에서도 비춰 지듯 앨범은 미진한 반응을 보였으며, 국내 취향의 발라드인 'On My Own'을 마지막 싱글로 하며, 아쉽게도 본 작은 휘트니의 전성기에 한 참 모자란 전 세계 200만장의 앨범 판매고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이후 2003년 11월, 휘트니는 크리스마스 캐롤의 고전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각색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던 캐롤 앨범 [One Wish: The Holiday Album]으로 소폭의 히트를 기록하였으나, 그 후로 수년 간 음악적인 이야기 보다는 사생활 위주의 가십성 기사로 언론의 도마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음악 팬들로부터 안타까움을 자아내었다.


2009년 2월, 휘트니 휴스턴은 7년 만에 6번째 정규 앨범 [I Look To You]를 발매했다. 알 켈리가 작곡한 가슴 따뜻한 발라드 넘버 'I Look To You', 앨리샤 키스 작곡의 'Million Dollar Bill' 등을 수록된 이번 앨범은 그의 영원한 파트너인 클라이브 데이비스와 의기투합하여 눈부신 재기를 이뤄낸 수작이었다. 7년 만의 컴백 앨범으로 당당히 빌보드 앨범차트 1위로 데뷔, 17년 만에 또 한번 정상을 정복하는 쾌거를 거두었고, 전세계 미디어들은 연이어 휘트니 휴스턴의 컴백에 뜨거운 찬사를 보냈다.
앨범의 성공과 더불어 그녀는 10년 만의 월드 투어인 'Nothing But Love World Tour'를 발표하며 전세계 팬들을 열광시켰다. 그리고 그 월드 투어의 첫 번째 신호탄을 쏘아 올린 국가는 놀랍게도 바로 한국이 되었고, 휘트니 휴스턴은 2010년 2월 6일과 7일 이틀에 걸쳐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최초의 내한 공연을 가지며 국내 팬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하지만 한국을 첫 시작으로 이어졌던 전세계 투어는 그녀의 컨디션 난조로 인해 속속 취소가 되며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2012년 2월 11일, 그녀는 오랜 친구이자 멘토 역할을 해온 아리스타 레코드 레이블의 대표 클라이브 데이비스와 그래미 전야제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비버리 힐스로 향했으며, 투숙 중이던 비버리 힐튼 호텔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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