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정보

김흥국

김흥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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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유형
남성/솔로
스타일
트로트
데뷔
1985년 / 잊어 버리세요
아티스트 소개

콧수염, 축구, 해병대, 불교, 10대 가수 등의 트레이드마크로 유명한 김흥국은 10여 년간의 무명시절을 겪다가, 상식을 깨는 춤과 특유의 허스키한 웃음이 들어간 노래로 10대 가수의 반열에 오른 가수이다.


지금은 반짝 가수의 멍에를 쓰고 평범한 연예인의 한 명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방송국 주변을 돌며 DJ와 MC, 오락 프로그램의 게스트, 축구시즌이 되면 응원부대의 한 사람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며 무명에서 건져준 음악 쪽보다는 종합 엔터테이너의 길을 걷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의 일원으로 드럼을 쳤던 그는 졸업 후 음악학원에 들어가 동창생들과 그룹 빅 버드(Big Bird)를 결성해 밤업소를 돌며 연주를 했다. 하드록을 하고 싶었던 그는 팀원들과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만 군입대로 음악에 대한 꿈은 기약 없는 내일로 점점 밀렸다. 군부대에서 7인조 스윙밴드를 만들어 베이스를 치던 그는 제대 후 군 시절의 친구와 그룹 오대장성을 만들어 밤업소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노만 프로덕션에서 '당신을 사랑해요'란 곡으로 기념음반을 낸 김흥국은 1985년 이승수 작곡의 '창백한 꽃잎'으로 정식 데뷔한다. 이 곡은 라디오에서 약간의 인기를 얻었지만 무리하게 강행한 [창백한 꽃잎 콘서트]는 대부분의 무료 관객들로 가득 차 그에게 빚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이 곡을 듣고 그를 찾아온 그룹 배따라기의 리더 이혜민을 만남으로써 그의 음악은 한 단계 더 전진한다. 그는 그룹 1999에서 활동하던 멤버 이재인의 딸에 대한 이야기를 이혜민이 곡으로 만든 '정아'로 상당한 음악성을 인정받고 곧이어 '호랑나비'로 고공비행을 한다. '호랑나비'의 노래와 춤은 최대의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세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는 흥에 겨워 노래를 불렀지만 어느새 개그맨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후 줄곧 개그맨의 위치로 규정지어졌다.


1989년 각종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한 '호랑나비'로 그는 연말 10대 가수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TV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나와 결혼 상대 소개와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번칠이로 짓고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공개해 더욱 인기를 높였다. 이 당시 그의 히트작은 '호랑나비'뿐만 아니라 유행어 '아 ?응애에요'였다. 하지만 그는 이후 음악으로는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한다. 소울풀한 음색을 자랑했던 목소리는 모두들에게 코믹한 목소리로만 들렸고 '호랑나비'의 인기를 잇고자 비슷한 형식으로 노래한 '흔들흔들', 김건모의 '핑계'로 시작된 레게 열풍에 편승했던 '레게파티'나 드라마 [오박사네 사람들]에서 자주 흥얼거렸던 '내게 사랑이 오면', 자신의 태어난 해를 기념해 만든 '59년 왕십리', 그리고 2000년에 발표한 'Love potion no.9' 등은 모두 예외 없이 별다른 사랑을 받지 못했다.


축구꿈나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김흥국 장학재단]을 비롯해 축구에 관한 것만으로 여러 개의 직함을 가지고 있는 그는 가수보다는 축구에 대한 사랑과 효자로 사랑을 받고 있으며 어려운 이웃의 일에 집안일보다 더 발벗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이 잘 드러나는 방송인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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