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패동

RAINBOW99 2019.09.02 25
“제 음악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냥 이 역사가 중요한거죠.“

RAINBOW99 정규 7집 ‘동두천’



동두천에서의 생활

이 앨범은 2018년 2월부터 2019년 5월까지 RAINBOW99(레인보우99)라는 음악가가 동두천이라는 도시에 수시로 드나들며 만나고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표현한 앨범이다.

음악 팬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듯 레인보우99는 한동안 여행 프로젝트에 몰두했다. 발길이 닿는 곳으로 이동하다가 느낌이 오는 장소가 있으면 차에서 장비를 내리고 컴퓨터를 연결하고 즉석에서 음악을 연주했다. 풍경과 공간이 주는 느낌을 레인보우99라는 필터를 통해 고스란히 청자에게 전달했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녔고 심지어 유럽을 여행하면서도 그런 식으로 음악을 만들었다.

내가 그에게 “오랜만이에요. 저 기억하세요?”로 시작하는 페이스북 DM을 보낸 것은 2018년 2월 9일 새벽이었다. 여행하는 즉흥에 매료되어 있던 나는 그가 표현하는 동두천이란 도시를 듣고 싶었다. 그가 작업하는 방식대로 싱글 하나만 나와도 좋겠다고 생각해 초대한 것인데 채 5분도 되지 않아 이런 답을 보내왔다.

제 여행과 별개로 동두천은 하나의 다른 프로젝트로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동두천에 일정기간 머물면서 작업하면 또 다른 느낌의 곡이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작은 앨범이 될 수도 있구요. 날이 따뜻해지면 할 수 있는 것도 더 많구요. 캠핑도 가능하니까요!

돌이켜보면 그는 시작하기 전부터 이 앨범을 예상하고 있었다. 여행하다 우연히 지나가는 즉흥의 공간이 아니라 충분히 머물고 캠핑도 자처하고, 고민하면서 음악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마주친 역사

점성술이나 미신 따위를 믿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들을 아예 백지처럼 지워버리지도 않는 편이다. 우연찮게도 내가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던 며칠 전에 그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섹스 동맹 기지촌 정화운동]을 유투브에서 보았다고 했다. 동두천이라는 도시, 여성에 대한 국가적 폭력으로 규정되는 도시, 그 불명예 위에서 여느 지방중소도시처럼 선량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 그와 나는 일종의 공통감이 있었다. 점성술 같은 이야기는 또 있다. 그가 처음 동두천에 와서 낙검자 수용소, 일명 몽키하우스에 방문해 쓰레기 더미를 헤집고 들어갔을 때, 거기에는 시각 예술을 하는 여성 작가들이 전시를 위한 설치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장마 한낮에도 느껴지는 서늘함 속에서 그와 나, 여성 작가들은 호되게 놀란 간담을 한참이나 쓸어내린 뒤에야 동지처럼 악수를 나눴다. 결국 레인보우99는 그 작가들의 게릴라 전시 “안녕하세요. 당신은?”에 몽키하우스에서 캠핑하며 만든 곡으로 참여하게 된다. 앨범에 앞서 발표된 28분짜리 싱글 ‘낙검자 수용소, 밤’이 그 전시 참여 트랙을 가다듬은 곡이다. 미신 같은 몇몇 사건들을 겪으면서 레인보우99의 작업은 단순한 개인 작업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 역시도 이 앨범에 대한 의견을 비슷하게 말하고 있다. 그는 홍보 클립 말미에 이렇게 말한다.

제 음악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제가 어디서 느낀 뭔가를 만들어 냈을 뿐이에요. 그건 그냥 BGM이고,
그냥 이 역사가 중요한 거죠.

사실 동두천을 이러저러한 도시라고 말하기 주저스럽다. 물론 역사적 사실은 엄연히 존재한다. 예를 들면, 미군위안부라 불리는, 미군 성노예였던 여성들, 국가가 미군을 위해 성병을 관리했던 흔적들, 여자들을 모아놓고 여러분은 애국자라고 설명하던 공무원들, 미군 병사가 지명하면 어떤 조사도 없이 언덕 위 하얀집으로 끌고 가 과도한 페니실린을 투여했던 사실들. 부작용으로 등이 구부정해 창문에 매달려 멍하니 바라보던 눈동자들. 옥상에서 뛰어내리거나 도망치던 여자들. 그들에게서 나온 달라를 물고 다니던 개들. 그 달라로 시작한 한국의 천박한 자본주의, 눈뜨고 볼 수 없이 참혹한 윤금이씨가 살해당한 현장 사진. 가난했던 어린시절 성폭행을 당한 경험들. 가족마저 돌아서고 오직 좋은 미군을 만나 미국으로 이민 가기만을 바랬던 여자들. 생을 마감하면 상패동 무연고 묘지에 번호로만 남은 여자들. 죽은 친구를 꽃상여에 태워 캠프 케이시 정문 앞에서 시위하며 책임자의 사과를 받아낸 여자들. 비록 소수였을지라도 지금까지 동두천이란 도시를 규정하고 있는 여자들. 아직 보산동 클럽에서 쥬스를 팔고 있는 다른 나라 여자들.


분노와 슬픔 그리고 그 다음의 것

동두천을 이런 도시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생활인으로서 삶을 영위하는 대다수 시민들에게 도시에 대한 이런저런 규정은 모욕이다. 진짜 모욕은 세월이 많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동두천과 여성이라는 연결에 선입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어제 만난 20대 여성도 그랬다. 서울에 취직하려고 이력서를 낼 때 주소를 동두천으로 적지 않고 서울 사는 친척집 주소를 적었다고 했다. 동두천에 관심 있는 사람들도, 동두천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기지촌이라는 이름표는 아직 떼어지지 않았다. 버려진 여자들의 상처, 그 상처를 지고 사는 도시, 분노하기는 쉽다. 하지만 끈질긴 슬픔이 거머리처럼 떼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분노는 책임 없는 손쉬운 방법일 뿐이다.

동두천의 아픈 현대사는 동두천만의 것이 아니다. 여성의 문제, 환경의 문제, 인권과 평화의 문제, 접경지역 안보도시의 수난사, 심지어 한국대중음악 오리지널리티 이슈까지, 최근에는 난민 커뮤니티에 대한 이슈도 있다. 과연 이 이슈들이 동두천만의 것일까? 동두천은 어쩌면, 한국의 아픈 현대사가 선사한 슬픔이란 밀실을 빠져나갈 마지막 문제 풀이일지 모른다. 2000년대 동두천을 다룬 소설 [리틀 시카고]를 쓴 소설가 정한아는 동두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오래된 상처는 나아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아요. 일상과 문화의 정치로서 사람들이 동두천의 상처 치유에 참여하도록 해야 해요.”

레인보우99의 [동두천]이 소중한 이유는 바로 “일상과 문화의 정치”로서 상처 치유에 동참하는 예술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앨범은 한국 사회가 저지른 폭력에 대한 분노와 남겨진 사람들의 상처 사이에 있는 좁은 틈에 발을 딛고 있다.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현 시점의 자신을 역사의 공간과 마주치게 해 나온 체험으로 만들어진 작업이다. 무더웠던 지난 여름 상패동 무연고 묘지 주변을 오르면서 레인보우99가 한 말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노이즈로만 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서정이 나오더라구요.

이 말을 듣자마자 음악을 듣지 않고도 그의 작업을 신뢰했다. 예술이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생각해보면 기록이었을지언정 주체로서 행위한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이 앨범은 그렇지 않다. 거대한 슬픔을 맞닥뜨린 주체로서, 개인의 필터를 통과한 음악으로서 말하고 있다.


로드뮤직

역사적 문제의식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도시를 오가며 즉흥으로 담아내는 그의 작업방식은 적절했다. 거대한 담론의 무게에서 자유롭고 개인의 질척한 슬픔에 빠지는 오류도 벗어난다. 청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공간의 배경이 된 이야기를 알고 나면 더 깊은 감상을 할 수 있도록 만든다. 공간에 스며든 서사를 제하고라도 이 앨범은 레인보우99의 디스코그래피에서 도드라진 면모를 보인다. 모순이지만 그 도드라짐이 공간에 스며든 서사를 통해서 발현되었다는 점이 음악적으로 매우 흥미롭다.

역사에 마주 선 개인의 경외감일까? 그는 매우 조심스럽다. 기존 일렉트로닉 팝이나 중첩된 사운드 메이킹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의 정서를 가지고 끝까지 간다. 작은 소리나 작은 소리들의 세심한 변화, 노이즈처럼 끼어드는 주변 샘플링의 낮은 호흡들이 앨범을 장악한다. 특히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7번부터 9번 트랙, ‘턱거리 아파트’와 ‘턱거리 사격장’, ‘초소’는 묵직한 침묵의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이다. 턱거리는 동두천의 두 번째 기지촌이다. 유명한 기지촌 보산동이 몇몇 문화사업들로 근근이 명맥을 잇는 것과 달리 철저하게 몰락한 곳이다. 몇 년 전 LNG발전소 건립으로, 현재는 송전탑 문제로 주민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역설적으로 턱거리는 동두천 상처 치유에 정성을 쏟는 활동가들을 품어내는 곳이기도 한데, 턱거리 사격장은 오래전 주민들이 미군 공여지 반환투쟁의 성공을 이룬 곳이기도 하다. 산 중턱에서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는 캠프 호비의 탱크들과 이름 모를 기계들을 보면서, 그 옆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옛 클럽 거리를 보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동두천이 환유하는 우리 시대의 몰락과 슬픔의 조심스러운 마음을 읽어낸다.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상패동’(1번 트랙) 무연고 묘지 혼령들과 ‘보산동’(2번 트랙) 난민들의 대화 사이를 지나 몇 번의 범람으로 홍수를 몰고 온 ‘신천’(3번트랙)을 거쳐 왔다. 다음 트랙은 이게 지금까지의 동두천이었다는 듯 ‘동두천’(4번 트랙)이다. 이 앨범에 대한 또 하나의 신뢰는 앞부분과 뒷부분을 연결하는 ‘밤연기’ 연작의 고요한 상승과 냄새에 있다. 소규모 공장 단지에서 내뿜는 연기들, 산으로 둘러싼 분지지형이 모아낸 연기의 냄새들을 느꼈다는 것은 레인보우99가 단지 기존 자료를 통해 동두천을 이해하지 않고 동두천의 생활인으로서 체감했다는 방증이다. 그야말로 이것은 길 위의 음악이다.


Do Dream

Do Dream은 오랫동안 동두천시의 슬로건이었다. 시정 슬로건이 이렇게 공명을 일으킬 줄이야... 오래전부터 동두천은 꿈을 실행하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어렵고 지난하지만 시민들 안에서도 도시 밖에서도, 특히 레인보우99같은 진정성 넘치는 예술가들로부터 강력한 에너지들이 전해진다.

지난 2019년 6월 28일 몽키하우스, 폐허가 된 소요산 낙검자 수용소 안에서 레인보우99의 공연이 있었다. 그의 음악을 처음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강렬하게 몰두했다. 슬픔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장소와 그 공간의 서사를 해석하는 예술가,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들... 동두천이 10년 후, 20년 후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다. 여전히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아파할지, 상처를 통해 미래의 가치들을 찾아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날 작은 방에서의 시간만큼은 꿈을 실현하는 행복함이 있었다. 당신과도 그런 순간들을 공유하고 싶다. 이 앨범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꿈을 실현하는 매개체다. / 글 전자인형 (음악평론가/지역기획자)


-Credit-
RAINBOW99 - 동두천

Produced by RAINBOW99

RAINBOW99 | programming, sound design, piano, synth

aAll tracks composed, arranged by RAINBOW99
All tracks recorded & mixed by RAINBOW99 at 동두천
Mastered by RAINBOW99 at 동두천

Photo by 박상용 / planungbilder.com, 배민지 (MSB)
Artwork & Design by Ether Kim (MSB)
M/V Directed by 배민지 (MSB)
M/V Director of photography by 황지수 (MSB)
M/V Dancer by 강다솜 Kang da som, 최종원 Choi jong won


Executive / MAGIC STRAWBERRY CO., LTD
Management / Magic Strawberry Sound
Executive producer / Soda
Executive supervisor / 신동익

A&R manager / 안성문
Press work / 최혜미
Management support / 장유리, 신혜진

Published by POCLAN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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